지난달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때 찍힌 한 장면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캐나다 국민들이 각별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한국 기업인이 있습니다.
바로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입니다. 그는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를 맞이하기 위해 한화오션 거제조선소에서 '양귀비꽃 배지'를 가슴에 달았습니다. 캐나다에서 양귀비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전쟁에서 쓰러진 병사들을 추모하는 상징입니다. 캐나다 언론과 시민들이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상징을 한국 기업이 정확히 짚어낸 것입니다.
김 부회장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습니다. 국기 게양대에 태극기와 캐나다 국기 옆에 각각 메이저리그(MLB)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KBO 한화이글스 깃발을 나란히 올렸습니다. 당시 블루제이스와 한화이글스는 각각 월드시리즈와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있었습니다. 캐나다 총리가 응원할 수밖에 없는 팀과, 김 부회장이 구단주로 있는 팀을 한 자리에 세워 '야구'라는 공감 코드까지 더했습니다.
지난달 30일 카니 총리는 APEC 정상 가운데 유일하게 한화오션 거제조선소를 찾아 김 부회장의 안내를 받았습니다. 캐나다가 최대 60조원 규모 잠수함 사업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한국과 독일(티센크루프마린시스템스·TKMS)이 맞붙고 있는 '2파전'의 한복판이기도 합니다. 한화오션은 HD현대중공업과 '원 팀'을 이뤄 이 사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조선소 방문은 그야말로 카니 총리를 상대로 한 총력 세일즈의 무대였습니다.
김동관(앞줄 가운데) 한화그룹 부회장이 한화오션 블록 조립공장을 방문한 마크 카니(앞줄 맨왼쪽) 캐나다 총리를 안내하고 있다. / 사진제공=한화오션
카니 총리는 한화오션이 건조한 장보고-Ⅲ 배치-Ⅱ 1번함 장영실함에 직접 승함해 내부를 둘러봤습니다. 이 잠수함은 한화오션이 캐나다에 제안한 3600t급 디젤 전기추진 잠수함과 같은 플랫폼입니다.
한화오션은 잠수함 상부에 한국과 캐나다 국기를 함께 게양해 양국 협력의 의미를 강조했습니다. 여기에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한화이글스 깃발이 더해지면서, 국기게양대에는 양국 국기와 양국을 대표하는 야구팀 깃발이 함께 펄럭였습니다. 두 팀은 이후 각 리그에서 나란히 준우승을 하는 아픔도 공유했습니다.
현장을 지켜본 관계자들에 따르면, 카니 총리는 당초 계획보다 30분 정도 더 조선소에 머무르며 생산 시설과 잠수함을 꼼꼼히 살펴봤습니다. 그는 조선소를 떠나기 전 방명록에 "세계를 하나로 잇고 지켜내는 훌륭한 기업을 만들어 내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고 남겼습니다. 단순한 덕담으로 보기에는, 그날 한화가 준비한 '상징들'이 총리의 마음을 어느 정도 움직였다는 해석이 나오는 대목입니다.
양귀비꽃 배지는 김 부회장의 지시로 캐나다 현지에서 공수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캐나다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11월 11일을 기리는 '추모의 날(Remembrance Day)'을 운영하며, 매년 11월을 '추모의 달'로 지정합니다. 이 기간 캐나다 국민들은 '쓰러진 병사'라는 꽃말을 지닌 양귀비꽃 배지를 달고 참전 용사를 기립니다.
우리나라 현충일과 비슷한 성격이지만, 전쟁 경험이 깊은 영연방 국가 특유의 분위기가 겹쳐져 상징성이 매우 강합니다. 양귀비꽃 배지는 영국·미국·프랑스·호주 등 1·2차 세계대전 참전국 전반으로 퍼져 있지만, 캐나다에서의 의미는 각별합니다.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 / 사진그룹=한화오션
배지 판매 수익은 캐나다 재향군인회에 기부돼 상이용사와 퇴역 군인 지원 기금으로 쓰입니다. 배지 아래에는 'Lest we forget(우리가 잊지 않도록)'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캐나다 입장에서 '우리를 진심으로 기억해주는가'를 가늠하는 일종의 상징인 셈입니다.
캐나다는 6·25전쟁 당시 2만 6791명의 병력을 파병해줬습니다. 인연이 닿지 않았던 나라와 국민의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 목숨을 바쳐 헌신했습니다.
알려지는 바에 따르면, 당시 조선소를 방문했던 캐나다 정부 인사들은 양귀비꽃 배지를 단 김 부회장과 임직원을 보고 감사한 마음을 그러냈다고 합니다. 업계에서는 "캐나다 국민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상징을 정확히 이해하고 존중한, 교과서적인 '감성 외교'"라는 평가도 나옵니다.
이번 의전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양귀비꽃 배지와 야구 깃발이 따로 놀지 않고 하나의 스토리로 엮여 있다는 점입니다. 전쟁의 기억을 되새기는 양귀비꽃, 그 기억 위에 지금 현재의 일상을 상징하는 야구를 올려놓은 구조입니다.
캐나다 총리는 잠수함과 조선 시설을 보면서 동맹국의 방산 역량을 체크했고, 동시에 국기 옆에 걸린 블루제이스·한화이글스 깃발과 양귀비꽃 배지를 통해 '함께 기억하고 함께 즐기는 동맹'이라는 메시지를 읽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사진제공=한화오션
잠수함 사업은 기술·가격 경쟁도 중요하지만, 수십 년간 함께 가야 하는 동맹 파트너를 고르는 선택이기도 합니다. 김 부회장의 양귀비꽃 배지 의전은 "우리는 캐나다가 지키고 기억해 온 가치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시그널을 보낸 장면으로 여겨집니다.
한국이 "캐나다의 피를 빚진 나라"라는 역사적 사실을 상기시키고, 동시에 "그 빚을 잊지 않고 함께 기억하겠다"는 메시지를 담았다는 해석이 나옵니다. 숫자와 계약서를 넘어, 기억과 존중을 앞세운 '김동관식 감성 세일즈'가 한 번 더 각인된 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