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 패키지 게임 시장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한국 게임 산업은 '온라인'이란 단어와 함께 언급됐습니다. 수많은 명작 MMORPG가 세계 곳곳에서 인기를 얻었지만, 동시에 '국내는 콘솔·패키지 불모지'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자리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그 공식을 깬 작품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네오위즈 'P의 거짓'
'P의 거짓'(Lie of P)이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으며 K-게임의 기술력과 서사가 통한다는 사실을 입증했고, 이어 '스텔라 블레이드', '커스트 버서커: 카잔'과 같은 타이틀들이 연이어 흥행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 게이머들의 관심은 단순히 '잘 만든 온라인 게임'이 아니라 '어떤 국산 콘솔 게임이 세계 시장에서 통할 것인가'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이에 맞춰 국내 주요 개발사들이 PC와 콘솔을 겨냥한 대형 패키지 프로젝트를 앞다퉈 준비 중입니다.
이번 기사에서는 그중에서도 기대를 모으고 있는 국산 콘솔 게임 7개를 중심으로, 국산 콘솔 게임이 어떤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는지 짚어보고자 합니다.
갓 세이브 버밍엄 - 중세식 좀비 아포칼립스의 새로운 해석
카카오게임즈 '갓 세이브 버밍엄'
'갓 세이브 버밍엄(God Save Birmingham)'은 카카오게임즈의 자회사 오션드라이브 스튜디오가 개발 중인 생존 액션 게임입니다.
흑사병과 폭력, 도시 붕괴의 공포가 일상이던 14세기 영국 버밍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햇살이 내리쬐는 낮에도 음울한 분위기가 퍼지는 게임 세계는 좀비까지 등장해 플레이어를 괴롭힙니다.
불을 피워 요리를 하고, 상처에 붕대를 감는 등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식량과 피로를 관리하고, 무거운 물체를 좀비에게 던져 쓰러뜨리거나, 책상이나 가구를 문앞에 막아 출입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전투보다 '버텨내는 기술'이 게임의 주역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흔한 좀비 슈터가 아니라 물리 기반 생존 시뮬레이터에 가깝습니다.
플랫폼은 PC(스팀)이며, 콘솔 대응 역시 전제에 두고 글로벌 시장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출시 시점은 앞서 해보기(Early Access) 형태로 예고된 상태입니다.
기존 좀비물과 중세 유럽을 무대로 삼아 차별화를 꾀한 '갓 세이브 버밍엄'은 국내 시장 성공 후 해외로 확장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개발 초기 단계부터 해외 유저를 타겟으로 삼으며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더 렐릭: 퍼스트 가디언 - 국산 소울라이크의 진화
프로젝트 클라우드 게임즈 '더 렐릭: 퍼스트 가디언'
'더 렐릭: 퍼스트 가디언(The Relic: First Guardian)'은 프로젝트 클라우드 게임즈가 개발 중인 액션 RPG입니다.
업계와 커뮤니티가 붙여준 별명은 "국산 소울라이크"지만, 이 게임은 고통을 강요하는 난도만으로 자신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무기 선택과 패링 타이밍, 보스의 패턴 읽기 같은 액션 핵심은 날카롭게 다듬는 한편, 스태미너 게이지 관리에만 매달리는 구식을 비틀고, '마지막 수호자'라는 주인공 서사를 전면에 세워 몰입을 끌어올립니다.
플랫폼은 PS5, Xbox Series X|S, PC로 글로벌 멀티 플랫폼 동시 출시를 전제하고 있고, 2026년 초 출시 계획까지 공개되어 있습니다.
흥미로운 건 이 작품이 거대 퍼블리셔가 아니라 비교적 젊은 팀에서 나왔다는 점입니다.
한국산 콘솔 액션 RPG가 더 이상 '대형사의 여유 프로젝트'가 아니라, 2020년 설립한 신생 스튜디오의 첫 승부처가 되었다는 사실은 의미가 큽니다.
무당: 두 개의 심장 - 한국형 잠입 스릴러
이브이알스튜디오 '무당: 두 개의 심장'
이브이알스튜디오(EVR Studio)의 '무당: 두 개의 심장(MUDANG: Two Hearts)'은 전형적인 판타지 액션이 아닙니다. 이 작품이 그리는 무대는 근미래 한반도입니다.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이 게임은 분열과 충돌의 여파가 채 가라앉지 않은 상황에서 국가적 위기를 둘러싼 테러와 음모, 그리고 그 진실을 파고드는 인물들의 감정선이 서사의 축을 잡습니다.
게임플레이는 영화 같은 3인칭 시점의 시네마틱 액션 위에 스텔스 침투, 근접 제압, 전술 돌입을 플레이어가 상황에 맞게 섞어 쓰는 구조입니다.
이브이알스튜디오는 모션 캡처와 페이스 캡처를 적극 도입해 등장인물의 표정과 감정선을 드라마처럼 끌어올리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국산 콘솔 서사가 드디어 한국 드라마급 감정의 결을 갖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무당: 두 개의 심장'은 Xbox Series X|S와 PC 등 차세대 콘솔을 전제로 2026년 출시가 예고되어 있습니다.
붉은사막 - 한국식 블록버스터 게임
펄어비스 '붉은사막'
펄어비스의 '붉은사막(Crimson Desert)'은 한 문장으로 요약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픈월드 액션 어드벤처 RPG, 싱글플레이 서사, 물리 기반 상호작용, 거대한 생명체 사냥, 용병단의 생존과 정치적 음모... 이 모든 키워드를 한 덩어리로 밀어붙이는, 말 그대로 '한국식 블록버스터'입니다.
'검은사막'으로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 기술력을 증명한 펄어비스는 이번엔 철저히 패키지형 콘솔 경험을 전면에 둡니다.
전투는 맨몸 격투, 무기 전환, 공중 낙하 공격, 거대 몬스터 포획까지 쉼 없이 변주되고, 플레이어는 단순히 '퀘스트를 따라가는 손님'이 아니라 세계 속 변수로서 기능합니다.
'붉은사막'을 두고 전 세계 게임 매체의 호평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북미 게임 전문 매체 Game Tyrant도 붉은사막을 "현대의 걸작(modern masterpiece)"으로 표현하고, 프랑스 게임 전문 매체 JeuxVideo도 "2026년 가장 기대되는 게임이 GTA6라면, 붉은사막은 그 뒤를 바짝 쫓고 있다(isn't far behind)"며 기대감을 보였습니다.
'붉은사막'은 PC와 PS5, Xbox Series X|S 등 멀티 플랫폼 출시가 예정되어 있으며, 출시일은 2026년 3월 20일입니다.
우치 더 웨이페어러 - 조선 판타지의 AAA 액션
넥슨게임즈 '우치 더 웨이페어러'
넥슨 산하 로어볼트 스튜디오가 개발 중인 '우치 더 웨이페어러(Woochi the Wayfarer)'는 방향부터 다릅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익숙한 서양 판타지가 아니라, 조선 시대를 변주한 '조선 판타지'를 전면에 내겁니다.
도깨비, 구미호 같은 한국 전통 요괴, 조선식 건축과 의복, 권력의 부패와 설화적 영웅상까지 지금까지 주류 콘솔 시장에서 보기 어려웠던 미학이 게임의 세계관 그 자체입니다.
게임은 싱글플레이 액션 어드벤처로 설계되고 있으며, 주인공 전우치가 조선을 떠돌며 초현실적인 사건을 해결해 나갑니다.
아직 구체 출시일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PS5·Xbox Series X|S·PC 플랫폼으로 글로벌 출시가 예정돼 있습니다.
한국적 요소를 담은 '우치 더 웨이페어러'는 국내외 게임 유저들에게 기대작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케이팝 데몬헌터스'에 등장하는 갓 차림의 까치가 등장하고, '오징어게임'의 음악감독 정재일이 참여해 화제가 됐습니다.
이러한 게임 내 요소는 다른 문화권의 게이머들이 느낄 다소 익숙하지 않은 문화에 대한 심리적 허들을 낮출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프로젝트 탈 - 한국 신화를 AAA 오픈월드로
위메이드맥스 '프로젝트 탈'
위메이드맥스가 개발 중인 '프로젝트 탈(Project TAL)'은 한국 전통 '탈(가면)' 문화와 민속 설화를 코어 콘셉트로 끌어올린 오픈월드 액션 RPG입니다.
서구 중세나 북유럽 신화 대신, 한국식 주술과 괴이, 그리고 탈이라는 상징 장치를 전면에 두고 거대한 괴물과 파괴된 세계를 무대로 삼습니다.
'한국적 정체성을 가진 글로벌 AAA 오픈월드 액션'이라는 지향점이 분명하게 느껴집니다.
전투는 거대한 적의 약점을 기동적으로 파고들어 전세를 뒤집는 스타일, 동료 NPC와의 협력, 필드를 가로지르는 자유로운 이동 액션 등이 강조되었습니다.
위메이드는 자회사 위메이드M에서 '미르의전설' IP를 활용한 PC 콘솔게임을, 또 위메이드맥스에서 '프로젝트 탈'과 '미드나잇 워커스'를 준비 중입니다.
콘솔 게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위메이드의 행보에 기대가 쏠리고 있습니다.
빈딕투스: 디파잉 페이트 - 온라인 액션의 콘솔 진화
넥슨 '빈딕투스: 디파잉 페이트'
'빈딕투스: 디파잉 페이트(Vindictus: Defying Fate)'는 넥슨 CAG Studio가 만드는 차세대 액션 RPG입니다.
IP는 '마비노기 영웅전(Vindictus)'을 활용하지만 접근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전형적인 '파티 던전식 온라인 액션'을 그대로 복제하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언리얼 엔진 기반의 사실적 물리, 높은 위험·높은 보상 구조의 근접전, 회피·패링·카운터를 반복하며 한 명의 캐릭터에 몰입하는 전투 경험을 전면에 세웁니다.
'추억의 온라인 게임 리마스터'가 아니라 '국산 근접 격투 액션을 글로벌 콘솔 패키지 언어로 번역한 신작'으로 보는 것이 더욱 적당합니다.
플랫폼은 PC(스팀)와 콘솔 멀티 플랫폼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출시일은 아직 미정이지만, 지난 6월 17일 글로벌 알파 테스트를 마무리하며 정식 출시를 향한 발걸음을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국산 콘솔, 이제 '장르 수입업자'가 아니다
성숙기에 들어선 글로벌 콘솔 게임 시장에 국내 게임사들은 후발주자입니다. 일각에서는 '너무 늦었다'는 우려도 나오지만, 기술력과 신선한 장르, 그리고 독특한 서사를 통해 새로움을 무장했습니다.
시장 공략 방식이 '서구 판타지 따라잡기'에서 '한국적인 것의 수출'로 바뀌고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끕니다.
조선 시대를 판타지화해 조형 언어 자체를 한국적으로 가져가거나, 한반도 위기 상황이라는 정치 스릴러를 전면에 세우거나, 전통 탈을 AAA급 비주얼 아이콘으로 만듭니다.
과거에는 한국 게임을 글로벌 틀에 맞추려고 했다면 지금은 우리가 가진 정체성을 글로벌 룰 위에 얹고자 하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콘솔 게임은 온라인과 차별화된 수익 창출을 이뤄낼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게임만 잘 만들어 발매한다면,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할 필요성이 적어 관리 비용을 절감하면서도, DLC 등을 통한 수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시작 단계지만, 기술력과 서사, 그리고 문화적 정체성을 모두 품은 작품들이 하나둘 현실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흐름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는다면, '패키지 불모지'라 불리던 한국은 머지않아 아시아 콘솔 시장의 새로운 거점으로 떠오를 것이란 기대가 점차 커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