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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변'으로 빨래까지 해야 했던 조선 시대 노비들의 일상생활

조선시대 노비들의 힘겨운 삶을 소해가는 글이 최근 각종 국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KBS2 '추노'


[인사이트] 장경윤 기자 = 우리가 가난한 생활을 빗대어 표현할 때 흔히 사용하는 단어 '노비'. 그러나 진짜 노비의 삶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고된 것이었다.


최근 각종 국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조선 시대 노비들의 힘겨운 일상생활을 다룬 글이 올라와 화제를 모았다.


먼저 노비는 조선 시대의 신분 제도 중 가장 밑바닥에 속하는 '천민' 계급으로, 백정 혹은 무당, 기생 등과 동급이었다.


조선 후기를 제외하면 부모 중 한 사람이 노비여도 자식은 무조건 노비로 속했기 때문에, 노비가 가장 성행했던 시기에는 전체 인구 대비 노비의 비율이 40%에 육박하기도 했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JTBC '하녀들'


대부분 성씨가 아닌 이름만을 가질 수 있었던 노비들은 각종 청소와 밭일 등을 맡으며 양반의 수발을 들었다.


별다른 세제가 없던 이들은 삭힌 소변과 잿물을 섞어 빨래를 했으며, 불을 피우기 위해 4시간 동안 부싯돌을 떼야 할 때도 있었다.


소를 산책시키며 나온 소똥도 직접 풀을 뜯어 치워야 했다.


또한, 노비는 자신이 어떠한 부당한 일을 당해도 관청에 피해 사실을 고발할 수 없었다. 만약 이를 고발한다면 도의를 져버리는 것으로 간주되어 중죄를 받았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tvN '렛츠 고 시간탐험대'


조선 내에서 가장 심한 천대를 받다 보니 노비의 값은 가축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조선 초기에 기록된 자료에서는 "노비의 값은 많아도 오승포(중급 정도 품질의 베) 150필에 불과한데 말 값은 400~500필"이라며 "가축을 무겁게 여기고 사람을 가볍게 여겨 도리에 어긋난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힘겨운 삶 때문에 당시 노비가 도망가는 비율 또한 꽤 높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초기 영의정으로 지냈던 한명회의 기록에 따르면, 1484년 당시 45만의 공노비 가운데 22%가 주인의 수탈과 학대를 피해 도주를 택했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EBS 캡처 사진


물론 조선의 노비는 서양권의 '노예'와 같이 아예 물건 취급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조선의 노비는 사회의 공민임을 뜻하는 납세의 의무를 지고 있었으며, 노비의 비율이 워낙 높아 실제적으로는 가난한 상민과 크게 구분되지 않았다.


특히 국가재정이 악화된 조선 후기에는 노비들도 나라에 공을 인정받거나 재산을 기증하며 신분 상승을 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처럼 혼란한 역사 속에서 갈수록 무너져간 노비제는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공식적으로 폐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