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BS '인터뷰 대한민국-1998년 IMF生'
[인사이트] 황규정 기자 = 모두 자기 살기만 바쁜 현대 사회에서 고통을 분담하고 함께 나누는 것을 실천하고 있는 '건물주'가 있다.
지난 27일 방송된 EBS 특집 다큐멘터리 '인터뷰 대한민국-1998년 IMF生' 2부에서는 부의 양극화 시대에서 그 간극을 조금이나마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따뜻한 시민들의 삶을 조명했다.
포항의 한 골목 어귀에서 20년 째 어구 가게를 하고 있는 심보경(61) 씨는 메르스가 전국을 강타했던 2015년의 그 날을 잊을 수 없다.
5월에 불어닥친 메르스 전염으로 전통시장 방문객과 매출액은 50~80% 감소했고, 심씨도 그 타격을 고스란히 받았다.


EBS '인터뷰 대한민국-1998년 IMF生'
손님은 없는데 세는 다달이 내야 하니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그때 건물주로부터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문자에는 "요즘 메르스 여파로 힘드시죠. 사장님 고통을 분담하겠습니다. 6월 한 달 월세는 반만 주십시오"라고 적혀 있었다.
심씨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했다. 다음 달에도 건물주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다면 7월 역시 월세를 반만 받았다.
심씨는 "뉴스에서 서울 같은 데만 해주는 줄 알았더니 포항에도 근엄한 주인이 세를 반으로 달라고 하더라. 얼마나 고마운지. 그런 분이 어디 있느냐"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EBS '인터뷰 대한민국-1998년 IMF生'
어구가게 사장님에게 월세를 반만 받겠다고 먼저 손을 내민 '건물주'는 전문 임대업자가 아닌 평범한 식당 사장님이었다.
올해 58세인 권오만 씨는 두 달이나 세를 깎아준 이유를 묻자 조심스럽게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꺼냈다.
중학교 때 형님과 함께 월세방에 살았다는 권씨는 재래식 화장실에서 서서 용변을 보다가 소변이 튀어 집주인에게 크게 혼났다.


EBS '인터뷰 대한민국-1998년 IMF生'
그날의 트라우마 때문에 권씨는 지금까지도 앉아서 볼일을 본다고 했다. 월세를 낼 때마다 꼭 부자들에게 돈을 뺏기는 기분이었다는 권씨.
그 마음을 잘 알기에 권씨는 임대료를 받는 건물주가 된 후 누구보다 세입자를 우선적으로 생각하게 됐다.
대출 이자를 내야하는 등 권씨도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어렸을 적 월세살이했던 날들을 떠올리며 세입자들과 고통을 분담하기로 자청했다.
권씨는 "세입자들이 더 힘든 데 겨우 두 달 할인으로 칭찬받는 것이 죄송하다"고 겸손함을 보였다.
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좌) 연합뉴스, (우) GettyimageBank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하고 사는 사람은 비단 권씨 만이 아니다.
지난해 8월에는 대구 북구 매천동의 건물주 최모(65)씨가 장사 안 돼 힘들어하는 세입자 14명을 위해 6개월간 월세를 받지 않아 화제를 모았다.
당시 최씨가 세입자들에게 받지 않겠다고 한 월세는 무려 1억원이 넘는다.
세입자들이 고마운 마음에 십시일반 돈을 모아 상품권을 선물하자 최씨는 이마저도 건물을 단장하고 세입자들이 부담하는 도로점용료를 대신 내주는 데 사용했다.
최씨 역시 "힘든 시기에 이들에게 돈이 아니라 용기를 준다는 생각으로 행동을 옮겼을 뿐"이라며 겸손함을 드러내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