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여름, 미국 아리조나주 피닉스의 한 유명 레스토랑 주방에서 소리 없는 재앙이 시작됐다. 생닭을 손질하던 요리사가 도마를 물로 대충 헹군 뒤 그 위에 향신료와 숙성 고기를 올렸다.
이 사소한 행동은 58명의 집단 식중독으로 이어졌다. 보건 당국이 조사한 결과, 범인은 살모넬라균이었다.
주방 곳곳을 뒤지던 조사관들은 생닭과 고수, 그리고 '숙성 고기 전용'으로 지정됐던 플라스틱 도마에서 동일한 균주를 발견했다. 분명히 씻었다는데, 세균은 어떻게 살아남아 번식한 것일까.
흔히 사람들은 플라스틱 도마가 매끈하고 물을 흡수하지 않아 위생적이라 믿는다. 하지만 베테랑 기자의 눈으로 본 진실은 다르다.
플라스틱 도마는 새것일 때만 안전하다. 칼날이 닿는 순간 폴리에틸렌 소재는 매끈하게 잘리는 게 아니라 찢겨 나간다.
이 미세한 틈새는 입체적인 굴곡과 덮개를 가진 '세균의 요새'가 된다. 1994년 위스콘신 대학교 연구팀의 실험에 따르면, 칼자국이 난 플라스틱 도마는 세제와 뜨거운 물로 씻어도 세균이 거의 제거되지 않았다. 밤사이 칼자국 속에서 세균은 폭발적으로 증식했다.
반면 나무 도마의 반전이 흥미롭다. 연구팀은 당초 "나무 도마를 플라스틱만큼 안전하게 소독하는 법"을 찾으려다 결론을 뒤집었다.
나무 섬유질에는 모세관 구조가 있어 액체와 함께 세균을 내부로 빨아들인다. 안으로 끌려 들어간 세균은 수분을 잃고 고립된다.
게다가 나무 자체의 탄닌이나 폴리페놀 성분이 세균의 세포막을 공격하는 천연 항균제 역할을 한다. 실험 결과 나무 도마 표면의 치명적인 세균들은 3분에서 10분 만에 대부분 사라졌다.
물론 나무 도마가 무적은 아니다. 핵심은 '건조'다. 나무가 물을 머금고 축축한 상태가 유지되면 세균은 죽지 않고 적응하기 시작한다.
세균들이 스스로 보호막을 치는 '바이오필름(생물막)'을 형성하면 일반 세제나 표백제로도 제거하기 힘들다.
홍콩대학교 연구팀이 실제 재래시장의 나무 도마를 조사했더니, 세척 후에도 제곱센티미터당 약 220만 마리의 세균이 검출됐다.
이 도마로 고기를 썰자 고기 속 세균이 무려 1만 배나 폭증했다. 관리되지 않은 나무 도마는 세균의 덫이 아니라 배양기가 된 셈이다.
시중에 파는 '항균 도마'라는 마케팅도 맹신은 금물이다. 과거 미국에서 유행한 트리클로산 성분의 항균 도마는 제품 자체의 변질은 막아줄지언정 사용자의 건강을 지켜주지는 못한다는 판결을 받았다.
결국 도마의 위생을 결정짓는 것은 소재의 이름표가 아니다. 얼마나 깊은 칼자국이 방치됐는지, 조리 후 얼마나 완벽하게 건조했는지가 관건이다. 지금 당신의 주방에 있는 도마를 확인해 보라. 깊게 파인 칼자국이 가득하다면, 어떤 소독법을 찾기보다 새 도마로 교체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식중독 예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