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18일(목)

조선시대 외모 '1티어'로 평가받던 미녀가 왕자의 눈에 띈 뒤에 맞이한 최후

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MBC '신입사관 구해령'


[인사이트] 함철민 기자 = 조선왕조실록에서 미인은 여자의 고운 얼굴이나 모습을 의미하는 '자색'이란 표현으로 등장한다.


다만 자색이란 수식어가 붙은 미녀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즉 실록에 자색이 있었다고 기록된 여성들은 당대 '1티어' 미녀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인물이 태종 때의 어리라는 인물이다. 실록에 따르면 어리의 미모와 재주가 매우 뛰어났으며 이는 왕도 익히 알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당대를 살았던 젊은 남성들이라면 그녀의 외모를 보고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겠으나 안타깝게도 어리는 곽선이란 사대부의 첩이었다. 남편이 있는 유부녀였던 셈이다. 


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MBC '신입사관 구해령'


다만 태종의 아들이었던 양녕대군에게 어리가 유부녀란 사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같이 어울리던 무리로부터 어리가 엄청난 미녀였다는 소식을 들은 양녕은 그녀를 찾아갔다가 첫눈에 반하고 만다.


양녕은 어리를 본 첫 순간을 "머리에 녹두분이 묻고 세수도 하지 아니하였으나 한눈에 미인임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이후 양녕의 어리 앓이가 시작됐고, 그는 급기야 유부녀였던 어리를 궁으로 데려오기에 이른다. 


양녕은 이때의 어리의 모습을 "이튿날에 어리는 머리를 감고 연지와 분을 바르고 저물녘에 말을 타고 내 뒤를 따라 함께 궁에 들어오는데, 어렴풋이 비치는 불빛 아래 그 얼굴을 보니 잊으려 해도 잊을 수없이 아름다웠다"고 전했다.


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MBC '신입사관 구해령'


양녕이 사대부의 첩을 궁으로 데려오자 태종은 크게 분노했다. 


태종은 어리를 궁 밖으로 다시 내쫓았으나 양녕은 "아니 전하의 여인들은 다 궁궐로 불러들이면서 왜 신의 여인들은 다 쫓아내십니까?"라며 대들었다. 


이에 태종이 어리를 내쫓았다. 양녕은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라며 반성문을 썼지만 이미 어리는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돼 있었다. 


결국 다시 어리를 궁으로 몰래 입궁시켰다. 들키면 세자의 자리에서 폐위될 수도 있었지만 양녕은 사랑을 택했던 듯하다. 


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MBC '신입사관 구해령'


궁에 다시 들어온 지 1년쯤 되던 때에 어리는 양녕의 아이를 낳았다. 어리의 출산 소식은 태종에게도 닿았고, 태종은 다시 어리를 궁에서 쫓아낸 후 양녕을 세자의 자리에서 폐위시켰다. 


양녕이 유배에 오른 뒤 양녕의 장인이었던 김한로의 첩과 양녕의 유모는 어리를 찾아가 "대체 언제까지 우리 나으리의 신세를 망칠 거냐"며 구타했다. 


이후 죄책감에 시달리던 어리는 자책감에 시달린 탓인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태종 시기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어리는 그렇게 비참한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어리가 궁에 들어간 것이 양녕의 강압 때문이었는지, 불륜이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어리가 낳은 딸은 살아남아 결혼까지 한 것으로 전해진다. 


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MBC '신입사관 구해령'


어리와의 스캔들이 있었던 양녕은 17살부터 기생 봉지련, 소앵, 정종의 첩 초궁장 등과 불륜 관계를 맺어 크게 논란을 일으켰던 인물이었다. 


그가 어리와 관련한 일로 폐세자가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한편 양녕이 폐세자가 된 뒤 세자로 오른 인물은 태종의 셋째 아들이었던 충녕대군이다. 그가 바로 조선의 4대 임금 세종대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