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18일(목)

21살에 최연소 '디올' 수석 디자이너된 패션 천재가 퇴사하고 만든 '명품' 브랜드

humbleandrich


[인사이트] 임기수 기자 = 1957년 프랑스의 전설적인 디자이너 '크리스찬 디올'이 세상을 떠났다.


디올의 첫 번째 후계자가 누가 되느냐는 당시 패션계의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다.


모두의 관심 속에 후계자로 지목된 디자이너는 3년 전 패션학교를 중퇴하고 인턴으로 입사한 소심하고 깡마른 21세 청년이었다.


그의 정체는 놀랍게도 훗날 프랑스 명품 패션 브랜드 '입생로랑'의 설립자가 된 '이브 마티유 생로랑'이다.


영화 '이브 생 로랑'


생 로랑은 1936년 8월 1일 프랑스 알제리의 오랑에서 프랑스인 부모 '샤를르'와 '루시엔 안드레 마티외 생 로랑'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지중해의 한 별장에서 미켈레와 브리짓트라는 두 여동생과 함께 자랐다. 어린시절 그는 종이 인형을 만드는 것을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10대 초반까지는 어머니와 누이들을 위한 드레스를 디자인하는 등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이며 성장했다.


생 로랑은 어린 시절 감명 깊게 본 루이 주베 감독의 연극 '아내들의 학교'를 보며 디자이너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연극 속 인물의 의상을 11살에 직접 만들 정도로 그의 재능은 남달랐다.



영화 '생 로랑'


하지만 학교에서 그의 모습은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주로 10대 학생들이 다니는 파리의상조합학교 수업이 지루하다는 이유로 3년 만에 학교를 그만뒀다. 


학교의 도움 없이도 그의 재능은 빛났다. 국제 규모의 민간단체인 국제양모사무국의 콘테스트에 두 차례 수상했다.


19살의 나이에는 크리스찬 디올 하우스의 인턴 기회를 잡았다. 입사 3년 만에 디올의 최고 자리에 오르자 그가 꽃길을 걸을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수석 디자이너에 오른 그가 '비트족(1950년대 전후 저항적인 문화를 추구했던 젊은 세대)'을 겨냥한 패션을 선보이면서 상류층의 철저한 외면을 받았고 점점 디올에서 그의 입지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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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 LAURENT


하필이면 그때 그는 27개월짜리 입영통지서를 받았다.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 출신인 그는 군에 입대해 알제리 독립을 위해 참전해야 했다. 


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복무 3주 만에 병원에 입원했다. 디올 수석 디자이너 자리마저도 다른 이에게 넘겨줘야 했다.


하지만 생로랑은 1962년 1월 29일 자신의 이름을 내건 컬렉션을 선보이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다음 해에는 '입생로랑 이니셜'을 사용한 디자인 로고도 내놨다.


이 로고는 지금까지 화장품, 향수, 액세서리 등에 사용되며 여전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Instagram 'ysl'


패션가에서 생로랑은 21세기에 이른 지금에도 '혁명의 아이콘'으로 꼽힌다.


그는 '르 스모킹' 컬렉션에서 여성에게 화려한 드레스 대신 '턱시도'를 입히며 성 고정관념을 깼다. 그의 패션은 당시 여권 신장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생로랑은 기성복 라인 '생로랑 리브 고슈'도 선보였다.


상류층만의 전유물로 여겨진 패션에 실용성을 가미해 대중들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했다. 그가 선보인 기성복은 직장에 출근하고 신문을 보는 현대 여성상을 반영한 실용적인 옷들이었다.


현재 아침 출근길 여성들이 입고 있는 정장 바지도 그의 디자인에서 시작됐다고 과언이 아니다.

cinthiaspoon


생로랑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천재였다.


하지만 재능만으로 승부하지 않았다. 그는 성실한 노력파였으며 고난과 위기가 찾아왔을 때도 포기하지 않고 패션에 대한 열망을 불태웠다.


이제 많은 사람들은 그를 단순히 어린 나이에 명품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가 된 '천재'를 넘어선 패션의 '거장'으로 기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