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김다솜 기자 = 일본 정부의 권력을 등에 업고 다른 친일파들은 매국노 축에도 못 낄 만큼 일본의 앞잡이 역할을 했던 '악질 중의 악질' 이완용.
이완용은 일본군의 무력시위를 이용해 고종을 협박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내용을 담은 '을사늑약'을 체결하는 데 앞장섰다.
또 이토 히로부미의 사주를 받고 고종의 퇴위를 강요해 왕의 내정권을 박탈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국권을 상실했던 1910년 당시, 대한제국의 내각 총리대신이던 이완용은 나라를 일제에 통째로 팔아넘겼음에도 기쁨의 웃음을 지었다.
이런 '친일 매국노' 이완용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의외의 이야기들이 있다. 아래는 그에 대한 6가지 이야기다.
1. 이완용은 처음부터 친일파가 아니었다.
독립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지만 이완용은 독립협회 첫 위원장이었다.
그는 독립문 건립에 앞장섰던 핵심 인물이기도 했다.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독립문에 달린 '독립문(獨立門)' 현판을 직접 썼다고 전해진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완용의 행보는 매국보다는 '개혁'에 가까웠다.
하지만 중일전쟁, 러일전쟁을 거치며 일본이 위세를 떨치자 이완용은 곧장 '친일파'로 노선을 갈아탔다.
2. 일본어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이완용은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집중적으로 교육 받았다. 1888년 주미 공사관에 서기관으로 임명되면서 당시 이완용은 대표적인 '친미파' 관료가 됐다.
그런데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미국이 조선에 손을 떼겠다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일본과 맺으면서 이완용은 180도 달라졌다.
이때 후원 세력을 잃은 이완용이 '친미'에서 '친일'로 노선을 갈아타게 된 것이다.
일본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했던 이완용은 을사늑약, 고종 강제 퇴위 등을 함께 도모한 이토 히로부미와는 통역사를 대동해 영어로만 대화했다고 한다.
3. 가족에게는 한없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이완용은 인사도 잘하고, 예의 바른 청년으로 유명했다. 특히 가족들에게 '효자'라고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데 10살에 부잣집인 이호준의 양아들로 들어가면서 양어머니와 의붓형제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늘 조용했던 그에게 양아버지 이호준은 "너는 말이 적어 표현을 못 한다", "처세에 대단히 좋지 못할 습관"이라며 꾸짖곤 했다.
그렇게 많은 지적 속에서도 이완용은 양부모와 친부모의 삼년상을 치를 정도로 효자였다고 한다.
4. 대한민국 최초로 의무 교육제를 도입시켰다
1888년 12월에 다시 주미 공사관 참찬관으로 임명돼 미국에 건너간 이완용은 미국의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3권이 갈린 민주 공화제, 신분 차별 없는 평등사회에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이완용은 근대적 교육제도에 깊이 매료됐다.
이때의 경험이 대한민국에 역사상 최초로 초등교육의 의무화와 근대적인 교사 양성사업과 같은 교육제도를 도입하는 데 경험이 됐다고 알려졌다.
5. 이완용이 사망 직전 아들에게 남긴 유언
1929년 2월 12일 이완용은 사망 직전 자기 아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그의 사망 원인은 폐렴이었다.
일제의 주구로 활동하며 권력을 얻고 호의호식하던 이완용이 남긴 유언이 조금 이상했다.
바로 친미파가 되라는 것. 이완용은 아들에게 "내가 보니까 앞으로 미국이 득세할 것 같으니, 너는 친미파가 돼라"고 조언했다.
6. 자신의 악행이 잘못인지 몰랐다.
이완용은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 일제가 우리의 주권을 빼앗기 맺은 정미 조약, 한일강제합병 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 의병 학살 등 일제 행위에도 앞장을 섰다.
이 같은 행동을 대가로 이완용은 일본으로부터 엄청난 저택과 많은 땅을 받았다. 지금 돈의 가치로 보면 600억원 정도다.
그가 매국노 중에서도 가장 악랄하다고 평가하는 이유는 더 있다. 바로 자신의 악행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
심지어 1919년 3·1 운동 중 이완용은 경고문을 통해 민족운동에 대해서 맹렬하게 비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