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19일(금)

102년 전 오늘(2일), 백발의 독립운동가는 조선 총독을 향해 목숨 걸고 폭탄을 던졌다

강우규 / 나무위키


[인사이트] 전준강 기자 = 1919년 9월 2일, 이제 막 조선총독부 총독 부임식을 마친 사이토 마코토의 마차로 폭탄 하나가 날아들어왔다.


폭탄은 사이토가 탄 마차를 지나 뒤차를 맞혔다.


일본인 취재기자 2명 포함 3명이 즉사하고 3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일본 경찰은 현장에 있던 조선인을 체포했다. 일본 경찰은 체포를 하고도 반신반의했다. 그리고 결국 풀어줬다.


체포됐다가 풀려난 이는 백발의 노인, 그해 64세였던 독립운동가 강우규였다.


국가보훈처


강우규는 1855년 7월 14일 평안남도 덕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의사로 일하면서 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을 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눈으로 본 그는 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순방하며 박은식, 이동휘 등 애국지사를 만나며 일제에 타격을 주려 고심했다.


1919년 3·1 운동 직후 일제의 탄압이 너무 심해지자 이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던 중 일제가 조선 총독을 교체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때 그는 결심했다. "새로이 부임하는 조선 총독을 처단해야겠다"라고.


얼마 뒤 새로운 총독은 사이토 마코토, 부임식은 1920년 9월 2일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처단의 대상이 된 사이토의 얼굴을 신문을 보며 익혔다.


국가보훈처


강우규는 거처를 남대문역 인근 여인숙으로 옮겼다. 매일 남대문역을 가 답사했다. 폭탄을 투척하기 가장 좋은 위치를 탐색하며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9월 2일 미리 봐둔 자리에서 대기하던 강우규는 오후 5시께 부임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사이토의 마차로 폭탄을 투척했다.


이 폭탄으로 3명이 사망하고 조선총독부 관리인 37명이 중경상을 입었지만 사이토는 크게 다치지 않았다. 계획이 실패한 것이다.


일본 경찰은 현장에서 강우규를 체포했지만 이내 풀어줬다. 64세의 백발노인이 그런 일을 했으리라 생각지 못한 것이다.


강우규는 실패를 만회하려 다시 한번 거사를 계획했다. 하지만 이행하지 못했다. 일제 앞잡이 김태석에게 체포됐기 때문이다.


그는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해 11월 29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많은 나이에도 굴하지 않고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한 몸을 희생한 강우규의 기개는 1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하고 있다.


1962년 정부는 강우규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