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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년 전 오늘, 전두환이 무력으로 나라를 빼앗은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났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는 군사 반란을 시도했고 성공시켰다.

인사이트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 Wikipedia


[인사이트] 전준강 기자 = 44년 전 오늘인 1979년 12월 12일.


차디찬 겨울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던 이날 밤, 서울에서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소장)이 주도한 '군사 반란(쿠데타)'이 일어난 날이다.


이 군사 반란은 전두환과 노태우 당시 육군 제9보병사단장(소장) 등이 주축이 된 군내 불법 사조직 '하나회'가 중심이 됐다.


하나회 소속 군인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위대로 암암리에 활약했었고, 군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정규 군사교육을 받지 않았던 육사 1~10기 선배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인사이트KBS


이러한 하나회는 전두환과 노태우, 그중에서도 전두환의 중심 하에 움직였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10·26 박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정권을 잡은 새 수뇌부는 갠 내부 개혁을 진행하려 시도했다.


당시 보안사령관을 맡은 전두환은 이에 불만을 품었고, 하나회를 중심으로 군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운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은 자신들을 몰아내려던 정승화 당시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의 공관에 난입해 총격을 가하고 정 참모총장을 강제로 체포했다.


한국 정치사에 5·16 이후 또 한 번의 군사 쿠데타가 시작된 것이다.


인사이트故 최규하 전 대통령 / 위키백과


최규하 당시 대통령에게 정 참모총장 체포 재가를 요청했지만, 두 차례 거절당했다. 국방장관의 동의를 얻어오라는 이유였다.


하나회 측에 포섭된 당시 노재현 국방장관은 정 참모총장 체포에 동의했고, 최 대통령은 결국 체포를 재가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최 대통령은 재가 결재서류에 1979.12.13.0510을 표기하며 '사후 재가'임을 공식적으로 기록했다. 이 덕분에 훗날 문민정부(김영삼정부) 당시 행해진 12·12 군사 반란 재판에서 하나회 일원들을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었다.


군사 반란 이후 하나회는 대한민국 군권을 장악했다. 대한민국이 또 다시 군대의 손에 넘어간 순간이었다.


인사이트군사 반란 성공 직후 보안사령부 앞에서 찍은 단체 사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국가를 빠르게 장악했다. 권력의 요직을 차지한 후 1980년 5월 17일 비상 계엄령을 발포하고 국가 권력을 탈취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5·18 광주민주화운동도 무력으로 진압했다.


최 대통령은 1980년 8월 신군부의 압박에 결국 하야했고, 다음 달인 9월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권력은 영원할 줄 알았겠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인사이트GettyimagesKorea


전두환은 1988년 2월까지 약 7년간 제11대, 제12대 대통령을 역임하고 하나회의 또 다른 축이었던 노태우가 1988년 2월부터 1993년 2월까지 제13대 대통령으로 재임하기는 했지만 김영삼의 문민정부에 와서 모든 게 무너졌다.


전두환, 노태우 등은 12·12 군사 반란의 주동자로 체포돼 재판을 받았다.


1심 선고에서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징역 2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항소심 선고에서 전두환과 노태우는 각각 무기징역, 징역 17년으로 감형됐다.


다만 이 죗값을 모두 받은 것은 아니었다. 김영삼 임기 말인 1997년 12월 특별사면을 받았다.


인사이트뉴스1


그럼에도 노태우는 사망 전 추징금을 모두 납부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학살 등 과거 행보에 대한 사과의 뜻을 전했다.


하지만 전두환은 2021년 11월 사망하기 전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