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에서 진심은 말보다 흔적에 남습니다. 회의록과 공정표, 계약서와 손익계산서 같은 것들입니다. 롯데바이오로직스가 2772억원 규모의 주주배정 유상증자를 결의하고, 조달 자금을 인천 송도 바이오 캠퍼스 1공장 건설에 투입하기로 한 결정은 그 흔적을 굵게 남긴 장면입니다.
대기업이 2700억원대 자금을 "오너 3세가 전면에 섰다"는 이유만으로 집행하는 일은 구조적으로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시장 전망, 수주 파이프라인, 공장 가동 시나리오, 자금조달 비용, 리스크 관리 방안까지 숫자로 쌓아 올린 뒤 이사회 토론과 의결을 거쳐야만 가능한 종류의 돈입니다.
이번 증자의 목적지는 분명합니다. 송도 바이오 캠퍼스 1공장입니다. 1공장은 2026년 완공, 2027년 상반기 상업 생산을 목표로 잡혀 있습니다. 롯데바이오로직스는 각 12만리터 생산시설 3개로 구성된 송도 캠퍼스를 단계적으로 조성해 2030년까지 총 4조6000억원을 투입하겠다는 계획도 제시해 왔습니다. 공장 한 채를 짓는 이야기가 아니라, 생산능력과 품질 시스템을 묶어 CDMO의 '시간표'를 다시 짜는 전략에 가깝습니다.
CDMO는 설비가 완성되는 날부터 매출이 생기는 사업이 아닙니다. 고객사 일정과 규제 대응, 밸리데이션을 통과해 가동률이 올라갈 때 비로소 숫자가 움직입니다.
그런 점에서 시장이 먼저 보는 건 공장보다 계약서입니다. 올해 들어 롯데바이오로직스는 아시아 소재 바이오 기업과 항체 약물접합체(ADC) 임상시험용 후보물질 생산 계약을 체결하며 시러큐스 ADC 생산시설 가동을 알렸고,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바이오 USA 현장에서는 영국 오티모파마와 항체의약품 위탁생산 계약을 맺었습니다.
9월에는 미국에 본사를 둔 글로벌 바이오 기업과 임상 3상 및 상업화를 겨냥한 CMO 계약도 체결했다고 밝혔습니다. '송도'라는 미래 시계와 '시러큐스'라는 현재 시계를 동시에 돌리려면, 결국 이런 트랙 레코드가 쌓여야 합니다.
다만 손익계산서는 아직 차갑습니다. 롯데바이오로직스의 2024년 매출은 2344억원 수준으로 집계됐지만 영업적자와 순손실이 명확하게 이어졌습니다. 회사가 "고객사의 생산 요청 시점에 따라 매출 인식 시기가 달라진다"는 설명을 반복하는 이유도, CDMO의 수익이 공장 준공이 아니라 생산 일정과 배치(생산) 배정에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투자자 관점에서 보면, 증설은 성장 옵션이지만 동시에 비용이기도 합니다.
경쟁 환경도 만만치 않습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등 선두 기업이 대형 수주와 증설로 속도를 내는 시장에서 후발주자가 존재감을 확보하려면 '규모'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결국 차별화된 포지션, 고객이 기대는 운영 신뢰, 그리고 일정 준수 능력으로 설득해야 합니다.
롯데바이오로직스가 시러큐스에서 ADC 생산을 본격화하고, 송도를 대량 생산 거점으로 키우며 듀얼 사이트 체계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고객사가 원하는 것은 '건설 계획'이 아니라 '납기와 품질'이기 때문입니다.
신유열 각자대표의 역할은 이 지점에서 평가가 시작됩니다. 그가 합류하기 전에 이미 결정된 투자도 있고, 공장 건설은 조직 전체의 축적된 의사결정 위에서 움직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경영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단계에서 리더십은 "새로 시작했다"가 아니라 "완성해낸다"로 증명됩니다. 수주 확대, 공장 준공과 상업 생산 전환, 비용과 현금흐름 관리, 품질 시스템의 일관성 같은 성적표가 앞으로는 그의 이름과 함께 기록될 가능성이 큽니다.
신동빈 회장이 10월 미국 시러큐스 현장을 찾으며 "바이오를 넘어 그룹 전체의 성장"을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바이오를 신사업 포트폴리오의 한 조각으로 두는 수준이 아니라, 그룹의 미래 성장축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현장에서 다시 확인한 셈입니다.
다만 바이오에서 의지는 선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의지는 결국 공장의 가동률, 계약의 반복, 손익의 전환이 뒤따라야 증명됩니다. 롯데바이오로직스의 이번 유상증자는 그 증명을 해보이겠다는, 가장 바이오다운 방식의 답안지로 읽힙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이제 롯데바이오로직스에 중요한 것은 수주일 것"이라며 "그 다음은 가동률인데, 그것을 통해 나오는 성적표가 신유열 각자대표 체제의 필요성을 평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