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로벌 인공지능(AI) 시장에서는 구글과 오픈AI의 맞대결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구글이 제미나이3를 앞세워 공세에 나서자, 오픈AI는 챗GPT 5.2로 반격에 나서는 모양새입니다. 전 세계 AI 패권을 둘러싼 두 빅테크의 경쟁은 기술 진보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운 장면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이 격돌은 자연스럽게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AI는 어디까지 와 있을까"
이 물음에 가장 자신 있게 이름을 올릴 수 있는 기업 가운데 하나가 LG입니다. 다만 LG가 선택한 답은 챗봇 경쟁의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LG는 AI를 화학과 바이오, 배터리와 의료 같은 과학의 영역으로 밀어 넣는 길을 택했고, 그 중심에 인공지능 '엑사원(EXAONE)'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LG가 엑사원을 통해 그리고 있는 그림은 구광모 회장 체제에서 제시된 'ABC 전략'과 맞닿아 있습니다. LG는 AI·바이오·클린테크를 하나의 성장축으로 묶으며, 기술을 개별 사업이 아니라 그룹 차원의 구조로 다루겠다는 방향을 제시해 왔습니다. 이 가운데 AI 축의 실체가 바로 엑사원입니다. LG AI연구원은 엑사원을 단순한 언어 모델이 아니라 언어·비전·바이오·재료 지식을 아우르는 파운데이션 모델로 설계해, 그룹 핵심 사업을 하나의 연구 인프라로 연결하겠다는 구상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엑사원의 방향성이 가장 또렷하게 드러나는 곳은 화학과 배터리 분야입니다. 연구 속도와 탐색 범위가 곧 경쟁력이 되는 영역에서 AI의 역할이 구체적인 성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LG AI연구원은 '재료 지능'이라는 연구 축을 두고, 양극재·전해질·분리막·촉매 등 배터리와 첨단 소재 후보를 엑사원 기반으로 탐색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엑사원 디스커버리' 플랫폼은 수십만 종의 화학 구조와 공정 조건을 가상 환경에서 빠르게 조합·분석해 유망 소재 후보를 선별하는 방식입니다. LG 측은 과거 연구진이 반복 실험을 통해 40개월 이상 걸리던 배터리 신물질 탐색 과정이 이 플랫폼을 활용하면 5개월 안팎으로 단축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고분자와 촉매, 탄소 저감 소재에서도 유사한 속도 개선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LG화학과 LG에너지솔루션이 쌓아온 소재 경쟁력을 엑사원이 계산력과 탐색 속도로 보완하는 구조로 읽힙니다.
바이오 영역에서는 LG가 엑사원을 단기 기술이 아닌 장기 연구 인프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 더 분명해집니다. LG AI연구원은 서울대 연구진과 함께 단백질 다중 상태 구조를 예측하는 AI 모델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기존 알파폴드 계열이 단백질의 단일 안정 구조 예측에 강점을 보였다면, LG가 겨냥하는 것은 단백질이 접혔다 풀리며 여러 상태를 오가는 동적 과정까지 함께 예측하는 모델입니다.
이는 질병 원인을 분자 수준에서 이해하고 신약 후보 물질을 선별하는 작업으로 이어질 수 있는 기술로 꼽힙니다. 구 회장이 엑사원 바이오 프로젝트를 직접 챙기고 있다는 발언이 이어지면서, LG의 AI 투자가 이미지 제고에 머무르지 않고 바이오 역량 강화를 위한 전략적 자산이라는 인식도 확산되는 분위기입니다.
의료 분야는 엑사원이 연구를 넘어 실제 현장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 제시됩니다. LG AI연구원은 20만×20만 픽셀에 달하는 초대형 병리 슬라이드 이미지를 효율적으로 분할·분석하는 병리 특화 딥러닝 모델을 개발해 오픈소스로 공개했고, 이를 바탕으로 암 진단과 예후 예측에 특화된 '엑사원 패스(EXAONE Path)' 1.x 버전을 국제 학회에서 선보였습니다.
올해 공개된 2.x 버전은 암을 넘어 다양한 질환으로 적용 범위를 넓히고, 치료 반응과 재발 위험까지 예측하는 정밀의료 플랫폼을 지향한다는 목표를 내걸고 있습니다. 삼성이나 네이버 등도 의료 데이터 AI에 뛰어들고 있지만, 병리라는 고도로 전문화된 영역에서 특화 모델을 만들고 오픈소스 생태계까지 구축한 사례는 LG의 행보가 비교적 두드러진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화학과 바이오, 의료와 배터리로 흩어져 보이던 프로젝트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는 기술적 기반이 '엑사원 4.x'입니다. LG의 AI 전략이 플랫폼 단계로 올라섰다는 신호로 해석됩니다. 엑사원 4.x는 일반 대화와 고난도 추론 모드를 하나의 모델 안에 통합한 하이브리드 구조를 채택했고, 최대 10만 자에 이르는 텍스트는 물론 도표·그래프·논문 이미지까지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비전·언어 통합 모델도 공개했습니다.
배터리 논문과 특허, 임상시험 데이터, 병리 슬라이드 이미지, 단백질 구조 정보처럼 서로 다른 형식의 과학 데이터를 한 번에 다룰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셈입니다. LG로서는 이 플랫폼 위에 화학·배터리·바이오·의료 계열사의 데이터를 얹어 공통 연구 인프라로 활용하겠다는 그림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이 같은 움직임을 두고 재계 안팎에서는 LG가 그룹의 정체성을 '과학 대기업'으로 재정립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삼성은 여전히 전자와 반도체 이미지가 강하고, SK는 통신과 데이터센터, 네이버와 카카오는 플랫폼과 콘텐츠에 무게 중심이 있다는 통상적 인식이 있습니다.
반면 LG는 엑사원 적용 사례를 과학 영역에 집중시키며, 그룹의 얼굴을 엔터테인먼트나 광고가 아닌 과학과 엔지니어링에 두겠다는 메시지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포브스 아시아 커스텀 리포트에서도 LG의 차별점으로 AI·바이오·클린테크의 결합과 화학 재활용, 배터리 소재 개발 전략이 함께 언급된 바 있습니다.
엑사원을 둘러싼 연구 생태계 역시 과학 중심으로 설계돼 있다는 점도 특징으로 꼽힙니다. 언어·비전 모델에 더해 바이오 지능, 재료 지능 전담 팀을 두고, 신약 개발과 단백질 설계, 배터리·촉매 설계로 이어지는 워크플로를 하나의 AI 파이프라인으로 통합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생성형 AI를 마케팅 문구 작성이나 고객 응대 자동화에 먼저 적용하는 사례와 비교하면, LG는 '엑사원 아틀리에' 같은 마케팅 도구보다 '엑사원 디스커버리'처럼 과학적 사실을 찾아내는 도구를 전면에 내세워 왔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다만 엑사원이 지향하는 과학적 성과가 모두 단기간에 가시화될 수는 없습니다. 엑사원이 제안한 배터리 신소재 후보가 실제 제품으로 얼마나 연결됐는지, 병리 진단에서 오진을 얼마나 줄였는지, 단백질 구조 예측이 신약 임상 성공률을 실질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추가 데이터와 검증이 필요합니다.
특히 의료 영역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설명 가능성과 책임 소재, 규제 문제는 더 까다로워집니다. 병리 판독이나 유전자 변이 해석은 환자의 생명과 직결되는 만큼, 연구용을 넘어 의료 행위의 일부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신뢰성과 검증 체계가 필수적입니다.
그럼에도 LG의 선택 방향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엑사원을 '국산 챗봇'이나 '주권 AI'의 상징으로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과학과 공학의 가장 깊은 영역으로 밀어 넣겠다는 전략입니다.
화학·바이오·배터리·의료를 하나의 두뇌로 묶는 과학 플랫폼을 먼저 구축하고, 그 위에 계열사 사업과 연구 데이터를 얹는 접근입니다. 이 구상이 일정 수준의 성과로 이어진다면, 엑사원은 단순한 AI 기술명이 아니라 LG라는 그룹을 규정하는 이름으로 자리잡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TV와 세탁기가 그랬듯, 이번에는 화학과 바이오, 배터리와 병원을 잇는 과학의 두뇌가 LG의 새로운 얼굴이 될지 지켜볼 대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