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내년을 기점으로 기술 중심 경영 체제로 본격 전환할 것이란 관측이 재계 전반에서 확산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안정과 관리에 초점을 맞춰 온 경영 기조를 사실상 마무리하고, 다시 한 번 '초격차' 전략을 전면에 내세우려는 흐름이 뚜렷해졌다는 평가입니다. 주요 전자 계열사가 참여한 대규모 신기술 펀드 조성과 기술 리더십 중심의 인사 개편이 이 평가에 설득력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2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벤처투자는 지난 28일 이사회를 열고 총 3000억원 규모의 'SVIC 76호 신기술사업투자조합' 출자를 확정했습니다.
출자에는 핵심 전자 계열사인 삼성전자를 비롯, 삼성디스플레이·삼성전기·삼성SDI 등이 모두 참여했습니다. 펀드는 향후 10년간 단계적으로 투자금을 투입하는 구조인데, AI를 비롯한 전략 기술의 빠른 변화에 대응하기 용이한 장기 투자 플랫폼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이처럼 전자 계열사가 한 펀드에 동시에 참여한 것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운용금액(AUM) 3조 4810억원 가운데 10%에 육박하는 규모로 조성된 단일 펀드는 사실상 역대 최대입니다. 각각 2천억원으로 최대 규모였던 2019년 'SVIC 45호', 2018년 'SVIC 38호'를 크게 웃돕니다.
업계 안팎에서는 "그룹 차원에서 AI를 '제2의 반도체'로 규정하고, 기술 확보 체계를 조직화하려는 의도가 읽힌다"는 반응이 나옵니다.
기술 중심 전환 기조는 인사에서도 드러납니다. 정현호 사업지원TF장 부회장이 용퇴하고, 전영현 DS부문장 부회장과 노태문 DX부문장 사장이 2인 대표이사 체제 전환이 대표적입니다. 명확한 기술 리더십 전면 배치라는 평가입니다.
정 부회장은 이재용 회장이 우여곡절을 겪던 시기, 그룹의 위기관리와 조직 안정 역할을 책임졌습니다. 하지만 이제 모든 리스크는 해소됐고, 경영 중심축은 '관리'에서 '기술'로 이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후임인 박학규 사업지원실장 사장은 재무·전략에 정통한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으로, 과학기술 기반 경영학을 연구한 이력까지 갖고 있습니다. 그룹 전반의 전략 관리 체계에 기술 기반 의사결정을 접목할 수 있는 인물로 평가됩니다.
전영현 부회장과 노태문 사장의 '투톱 체제'도 기술 중심 전환의 구심점입니다. 두 사람 모두 전자공학 분야에서 박사급 전문성을 갖춘 엔지니어 출신으로, 반도체와 모바일 핵심 기술을 이끌어 온 대표적 기술 리더들입니다. 여기에 더해 삼성은 SAIT 원장에 박홍근 하버드대 교수를 영입하고, 소프트웨어 기반 경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윤장현 삼성벤처투자 대표를 DX부문 CTO 겸 삼성리서치장으로 승진시켰습니다. 5년 만의 확대 승진에서 젊은 기술 인재가 대거 전면에 배치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됩니다.
삼성이 이러한 기술 중심 체제로 급선회하는 배경에는 최근의 HBM 경쟁에서 뒤처진 경험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AI 서버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며 HBM이 시장의 핵심 메모리로 부상했지만, 삼성은 제품 개발 속도와 투자 타이밍에서 경쟁사에 뒤진 것으로 시장은 평가했습니다. 이 경험은 기술 투자 속도와 의사결정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점검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HBM에서의 격차는 삼성 내부 전략을 강하게 자극했다"며 "AI에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분명해졌다"고 말했습니다.
AI 생태계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배터리, 소프트웨어, UX까지 긴밀히 연결되는 공급망을 필요로 합니다. 삼성은 이 전 주기를 그룹 내부에서 아우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글로벌 기업으로 꼽힙니다.
생성형 AI 확산과 데이터센터 투자 증가, 고성능 반도체 수요 확대가 동시에 전개되는 현시점에서 기술 확보 속도는 곧 시장 지위로 직결됩니다. 재계에서는 기술 중심 의사결정 구조를 강화한 삼성의 변화가 향후 몇 년간 AI 경쟁 구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재계 한 관계자는 "내년은 삼성이 기술 중심 전략을 본격 가동하는 원년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며 "최근 펀드 조성과 인사 변화는 초격차를 위한 체질 개선의 신호탄"이라고 전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