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이 통상 11월 말께 단행해 오던 정기 임원 인사를 12월 말로 늦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재계 안팎에서 조용히 번지고 있습니다.
인사 시점이 한 달가량 뒤로 밀렸다는 소식만 놓고 보면 화학·유통 부문에 칼바람이 불어닥칠 전조로 읽히지만, 요즘 분위기를 종합하면 오히려 신동빈 회장이 어떤 방식으로 버팀목을 세울지 고민을 거듭하는 과정에 가깝다는 해석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단순히 사람을 바꾸는 성과주의 인사보다는 산업 구조와 국가 경제의 변화를 함께 감안하며, 계열사들의 사기를 꺾기보다는 버틸 수 있게 뒷받침하려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시각입니다.
재계에 따르면 롯데는 그동안 이듬해 사업 계획을 정리한 뒤 11월 말 전후로 인사를 발표해 왔습니다. 특히 화학과 유통은 그룹 매출과 일자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축이라, 이 두 부문 최고경영진의 거취는 늘 인사 시즌의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올해도 롯데케미칼과 롯데쇼핑이 가장 먼저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롯데케미칼은 세계 경기 둔화와 석유화학 업황 악화, 글로벌 공급 과잉이라는 구조적 어려움이 겹치면서 실적이 흔들리고 있고, 롯데쇼핑은 고금리·고물가에 따른 소비 위축과 이커머스와의 경쟁 심화로 할인점·슈퍼 등 전통 유통 채널이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근 전해지는 말들의 뉘앙스에는 '기류 변화'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한 재계 관계자는 롯데 분위기를 전하며, 인사 시점이 뒤로 미뤄졌다는 이야기를 두고 처음에는 강도 높은 구조조정 신호로 보는 시각도 있었지만, 요즘에는 오히려 신 회장의 고민이 길어진 결과로 보는 쪽이 더 많다고 말했습니다.
이 관계자는 화학과 유통에 각자 내부 실책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현재의 실적 부진이 개별 회사 차원을 넘어 산업 구조, 나아가 국가 경제 구조 변화와 맞물려 있다는 인식이 그룹 안에서 분명히 자리 잡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실제로 석유화학 업계는 중국 증설과 글로벌 수요 둔화, 친환경 규제 강화가 한꺼번에 닥치면서 수년째 시황 부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유통 산업 역시 온라인 전환과 인구 구조 변화, 지역 상권 침체가 겹쳐 오프라인 점포만으로는 성장 동력을 찾기 어려운 환경이 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단기 실적만을 잣대로 책임을 묻는 인사를 앞세우면, 이미 부담이 쌓인 조직의 사기를 더 떨어뜨릴 수 있다는 우려가 그룹 수뇌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롯데케미칼과 롯데쇼핑이 각각 화학과 유통에서 구조적 위기와 싸우고 있다는 점을 들며, 지금 시점에서 최고경영자를 동시에 교체하는 선택을 하기보다는 어느 영역에서 구조조정을 더 밀어붙이고 어느 영역에서는 버틸 수 있게 힘을 실어줄지를 가르는 정교한 판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파격적인 인사로 위기를 부각하기보다는, 위기의 성격을 정확히 짚고 조직이 버틸 수 있도록 심리적 안전망을 제공하는 리더십이 발휘될 것이라는 인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합니다.
결국 인사 시점을 11월에서 12월 말로 늦춘 움직임은 두 가지 메시지를 동시에 담고 있는 것으로 읽힙니다.
하나는 화학과 유통의 체질 개선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는 점을 전제로, 각 계열사의 숫자와 전략을 끝까지 점검하겠다는 냉정함입니다. 다른 하나는 구조적 위기를 계열사 내부 노력만의 문제로 돌리지 않고, 그룹 차원에서 함께 책임지고 풀어가겠다는 신호입니다.
단기 성과주의를 앞세워 칼바람을 내리치기보다는, 어려운 시기를 함께 견디고 돌파구를 찾을 수 있도록 사기를 북돋우는 쪽에 무게를 두려는 고민의 시간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배경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반도체 업황이 바닥을 기던 시기 SK하이닉스가 택했던 방식도 재계에서 자주 거론됩니다. SK하이닉스는 2023년 한 해 7조7000억원이 넘는 영업손실을 기록하고도, 4분기 흑자 전환을 계기로 전 임직원에게 자사주 15주와 200만원가량의 격려금을 지급했습니다.
연간 기준으로는 여전히 적자였지만, 길게 이어진 다운사이클을 버텨낸 구성원을 향해 회사가 마지막까지 같이 버틴다 는 신호를 보낸 결정이었다는 평가가 뒤따랐습니다. 이후 AI 메모리 호황을 타고 실적이 사상 최고 수준으로 치솟자, 당시 격려금 지급이 단기 성과에 칼을 들이대기보다는 조직이 버틸 힘을 남겨둔 선택이었다는 점이 더욱 부각되고 있습니다.
인사가 실제로 12월 말에 이뤄질지는 확언할 수 없습니다. 11월 말, 전격적으로 이뤄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11월을 건너뛸 거라는 인식이 생겨난 상황을 두고, 재계 일각에서는 신동빈 회장이 화학과 유통의 성적표 앞에서 결단을 미루고 있어서가 아니라는 해석이 힘을 얻습니다.
어떻게 해야 계열사들이 산업 구조와 국가 경제의 거친 파도 속에서 버틸 수 있을지 그 해답을 조금 더 찾아보려는 것일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이번 연말 인사가 롯데케미칼과 롯데쇼핑에 어떤 결과로 돌아오든, 그 판단의 배경에는 단순한 책임 묻기 인사 카드로는 설명되지 않는 깊은 고민의 시간이 깔려 있다는 해석에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