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 기업인이 한 자리에 모인 자리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전통적 자본주의의 종언'을 선언하듯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던졌습니다. 사회 비용 급증으로 기존 시스템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진단과 함께, 양국이 함께 만들어가야 할 새로운 경제 모델로 '저비용 사회'를 제시한 것입니다.
지난 21일 오후 도쿄대 야스다 강당에서 열린 '비즈니스 리더 세션'에서 최 회장은 박철희 전 주일대사가 좌장으로 나선 패널 토론에 후지이 테루오 도쿄대 총장, 이와이 무츠오 일본경제동우회 회장 대행, 이한주 뉴베리글로벌 회장 등과 함께 참석했습니다.
최 회장은 이날 '전통적 자본주의는 민간이 효율성, 즉 이익을 극대화하고 정부가 그에 비례해 세금을 걷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굴러왔다'며 '하지만 사회 문제 해결 비용이 너무 빠르게 증가하면서 이 시스템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고 진단했습니다. 복지·환경·안전 등 사회적 비용이 단순히 '정부 몫'으로 남겨지는 구조로는 지속가능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입니다.
그는 해법의 핵심으로 SK그룹 경영철학인 'VWBE(Voluntarily, Willingly, Brain Engagement·자발적·의욕적 두뇌활용)'를 꺼냈습니다. 최 회장은 "자본주의는 결국 두뇌활용에 대한 인센티브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며 "사회 문제 해결에도 동일한 인센티브 구조가 작동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사회적가치를 창출하는 데 기여한 기업·조직에 '네거티브 세금(negative tax)'을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도 이 맥락에서 나왔습니다.
SK가 지난 10년간 100여 개 사회적기업을 대상으로 진행해온 '사회성과인센티브(SPC)' 제도도 소개됐습니다. 사회적기업이 창출한 사회적가치를 연말에 측정하고 이를 현금 보상으로 환산해 지급하는 방식입니다. 최 회장은 "실제로 인센티브를 주면 기업이 사회 문제 해결에 훨씬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된다"며 "AI·데이터 기술 덕분에 사회적가치 측정도 정량화가 가능해졌다"고 설명했습니다.
최 회장이 궁극적으로 제시한 모델은 '저비용 사회'입니다. 그는 "세금은 줄고 사회는 더 효율적으로 운영되고, 기업은 더 많은 자원이 생겨 혁신에 투자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며 "한국과 일본이 이런 모델을 함께 만들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한·일 양국이 현실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세 가지 축을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에너지 공동 운영입니다. 양국 모두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다는 점을 지적하며 "저장·공유·운용을 함께하면 비용을 크게 낮출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둘째는 의료비 협력입니다. 고령화로 의료비가 폭증하는 상황에서 양국이 각각 인프라를 중복 투자하는 대신 일부 상호 인정 제도를 도입하면 사회적 부담을 줄일 수 있다는 제안입니다.
셋째는 스타트업 협력입니다. 두 나라를 '사회 문제 해결 테스트베드'로 삼아, 사회 문제를 줄인 스타트업에 사회적가치 크레딧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혁신 생태계를 키우자는 취지입니다.
최 회장은 "한국과 일본이 힘을 합쳐 새로운 자본주의 모델을 만들 수 있다"며 "효율성과 사회적가치가 동시에 작동하는 체계를 구축한다면 양국 모두의 경쟁력이 커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급변하는 사회·경제 환경 속에서 기업이 주도하는 사회 혁신 모델이 어떤 현실적 변화를 가져올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