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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육사 선생이 형무소에서 숨을 거둔 날입니다"

74년 전 오늘은 한국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육사 선생이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한 날이다.

인사이트(좌) 이육사 / 이육사 문학관 , (우) 이육사 동상 / 연합뉴스


[인사이트] 김선혜 기자 = 74년 전 오늘은 한국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육사 선생이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한 날이다.


'황혼'과 '청포도' 그리고 '광야' 등의 주옥같은 시를 남긴 이육사의 본명은 이원록이다.


1904년 5월 18일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1925년 10대 시절 형들을 따라 의열단에 가입했다.


2년 후인 1927년 10월 18일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큰형 이원기와 동생 이원일과 함께 3년의 투옥생활을 보낸다.


이때 그의 수인 번호가 '264'였다. 이육사는 '독립의 사명감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수인 번호에서 비롯된 '육사'를 자신의 호로 채택했다.


그는 출옥 후 호를 바꾸는 것 외에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단체와 결탁해 투쟁에 힘썼다.


인사이트1934년 서대문형무소 수감 당시 신원카드 / 이육사 문학관


독립운동 중에도 작문 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이육사는 1933년 9월 한국에 돌아와 '이육사'란 이름으로 시집을 발간했다.


이육사는 시 속에 식민지에 대한 강렬한 저항과 민족정신을 담아 일제의 분노를 샀다.


하지만 이육사는 시집활동을 멈추지 않고 1935년에는 '황혼'을, 1937년에는 '청포도'와 '교목' 등를 발표하며 1941년까지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이때 무려 17회나 투옥됐다.


이후 1941년 폐병이 일어 잠시 요양했으나, 1943년 독립운동을 위해 찾은 북경에서 일본 순사에게 체포돼 이듬해인 1944년 1월 16일 끝내 옥사했다.


아픈 몸을 이끌고도 독립만을 생각했던 이육사를 기리며 오늘 그의 시 한 편을 낭독해 보는 것이 어떨까.


인사이트1941년 이육사 선생이 숨진 일제의 지하 감옥 / 연합뉴스


김선혜 기자 seonhye@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