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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시해한 암살범 죽이겠다며 10년 동안 추격해 응징한 29살 청년

1965년 당시 29살 청년이었던 곽태영은 김구 암살범 안두희를 19년 동안 추격해 그를 단죄할 목적으로 살해하려 했다.

인사이트백범 김구와 그가 서거했던 경교장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사이트] 함철민 기자 = "백범 김구의 시해범 안두희를 비수로 응징했지만 죽이지는 못했습니다. 민족의 반역자가 어떻게 단죄받지 않고 이 땅에 떵떵거리고 살 수 있단 말입니까"


26일 백범 김구 서거 70주년을 맞이해 그를 살해한 안두희에게 복수하려 했던 한 청년의 사연이 조명되고 있다. 


70년 전 오늘 백범은 당시 육군 소위로 복무 중이었던 안두희가 쏜 총에 맞아 서거했다. 


깊은 슬픔이 온 나라를 뒤덮었고, 장례식에는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 우리나라 최초로 국민장으로 치러진 백범의 장례식에는 무려 100만 명에 달하는 시민이 몰리기도 했다.


그 가운데에는 백범의 죽음을 슬픔에 찬 표정으로 바라보던 한 소년도 있었다.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의 이름은 곽태영이었다.


인사이트'혼란 속의 한국, 호랑이를 잃다', 칼 마이던스 / LIFE 1949년 7월호


당시 국민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던 곽태영은 이때부터 김구 암살범 안두희를 죽여야겠다는 각오를 가슴 깊이 새겼다. 


그리고 10여년이 흘러 성인이 된 그는 안두희의 사진을 품은 채 추적을 시작했다. 


곽태영이 성인으로 장성하는 동안 암살범 안두희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석 달 만에 15년 형으로 감형되더니 결국 사면돼 2계급 특진을 하고 6.25전쟁 때는 포병 장교로 복귀했다. 


제대 후에는 공납 공장 등을 운영하며 큰돈을 벌어들였다. 그는 연못을 낀 커다란 정자가 있는 집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았다. 


인사이트백범 김구 장례 행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곽태영이 안두희의 집을 알게 된 건 29살이 되고 나서였다.


안두희가 사는 동네에 잠입한 곽태영은 장사꾼으로 위장해 여러 민가에 양말과 장갑 등을 팔면서 그의 거취를 살폈다. 


1965년 12월 22일 아침, 그의 행보는 예정대로 이어졌다. 세수하려고 목에 수건을 걸치고 앞마당으로 걸어 나온 안두희 앞에 청년 곽태영이 섰다. 


"백범 선생의 시해 배후를 밝혀라!"


인사이트백범 김구 / 국가보훈처


이어 곽태영은 준비한 흉기와 돌로 안두희를 내리쳤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안두희가 숨졌다고 생각한 그는 그 자리에서 "김구 선생 만세! 남북통일 만세! 3천만 국민 만세!"를 외쳤다. 


범행 직후 경찰에 체포되고 나서도 "3천만 국민의 원한을 풀어서 통쾌하다"고 밝혔다. 


스물아홉 살 청년의 의분과 결단에 국민은 뜨겁게 들끓었다. 120만 명이 "애국 청년 곽태영을 석방하라"며 탄원서를 내기도 했다.


곽태영의 가족에게는 아들이 장한 일을 했다는 격려 편지가 1만여 통 쏟아졌다. 아버지도 아들이 자랑스럽다며 마을 사람들에게 잔치를 벌였다.


인사이트안두희 생전 모습 / KBS1


하지만 안두희는 죽지 않았고 곽태영은 1966년에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아야 했다. 


이후 일제 잔재 청산 등 사회 운동에 앞장섰던 곽태영은 결국 지난 2008년 12월 지병으로 눈을 감았다.


청년 곽태영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으면서까지 살해하려 했던 안두희는 어떻게 됐을까.


사건 이후 가명을 쓰며 숨어지내던 안두희는 1996년 10월 23일 버스기사 박기서가 휘두른 '정의봉' 몽둥이에 맞아 사망했다.


백범이 안두희의 총탄에 숨을 거둔 지 47년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