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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가 독립 가망 없다는 사실 알면서도 일본 향해 '폭탄' 던진 진짜 이유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 의거에서 윤봉길 의사가 일본 장성들을 향해 폭탄을 던진 이유가 전해졌다.

인사이트(좌) 네이버 지식백과, (우) 국가보훈처


[인사이트] 디지털뉴스팀 =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의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2부 행사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단상으로 접근한 윤봉길 의사는 숨기고 있던 물통 폭탄을 투척했고 굉음과 함께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를 계기로 대한민국은 중국 장제스의 지지를 받아 1930년대 무장독립투쟁을 이어가며 독립이 되기까지 우리의 정체성을 지켜나갈 수 있었다.


최근 3·1절 100주년을 맞아 많은 독립투사의 일화가 이야기되는 가운데, 윤봉길 의사가 감행한 이같은 훙커우 공원 의거의 남다른 의미가 재조명받고 있다.


인사이트국가보훈처


윤봉길 의사는 1932년 일본군이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왕 생일과 상하이 전쟁 승리를 축하하는 기념식을 한다는 소식에 거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의거에 앞서 1932년 4월 26일 김구가 이끄는 한인 애국단에 입단한 윤봉길은 단체의 지도자들과 함께 거사를 구체적으로 계획했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인 29일, 윤봉길은 폭탄을 감추고 식장에 입장해 2부 전승 기념식이 거행되는 순간 단상을 향해 수류탄을 투척했다.


거대한 굉음과 함께 폭발한 수류탄에 일본군 대장과 일본인 거류민 단장 등 거물급 인사들이 숨졌으며, 이 외의 굵직한 일본 인사들이 중상을 입었다.


인사이트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이후 일본군에게 체포돼 사형을 선고받고 사망하기 전까지 그의 행적 중 눈길을 끄는 것이 바로 1932년 7월 일본 내무성 보안과가 작성한 '윤봉길 신문조서' 내용이다.


"현재 조선은 실력이 없기 때문에 당장의 독립은 불가능할 것이다. 한두 명의 상급 군인을 살해한다고 해서 독립이 쉽게 될 리는 없다"


일본 당국과의 신문에서 윤봉길 의사는 "이번 (훙커우 공원 의거) 사건과 같은 것도 독립에 직접적인 효과가 없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다"라며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어 그는 "단지 기대하는 것은 이로 인해 조선인의 각성을 촉구하고, 나아가 세계가 조선의 존재를 명확히 인식하게 하는 데 있다"라는 말로 그의 의거가 가지는 의미를 밝혔다.


인사이트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우리들 독립운동가는 국가 성쇠의 순환을 앞당기는 것으로써 그 역할로 삼는다"


목숨을 바쳐 조국을 위해 투쟁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많은 변절자가 "일본 식민 통치하에 있자"는 자치론을 펼칠 때, 윤봉길 의사는 목숨을 바치는 독립투쟁으로 한 번에 나라를 살릴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의거했다.


그 힘든 시기에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독립투사란 "국가 성쇠의 순환을 앞당기는 것"이라 말한 윤봉길 의사의 결연한 의지와 숭고함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