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20℃ 서울
  • 18 18℃ 인천
  • 21 21℃ 춘천
  • 22 22℃ 강릉
  • 20 20℃ 수원
  • 20 20℃ 청주
  • 21 21℃ 대전
  • 19 19℃ 전주
  • 21 21℃ 광주
  • 22 22℃ 대구
  • 19 19℃ 부산
  • 20 20℃ 제주

오늘(2일)은 '헤이그 특사' 이상설 선생이 끝내 광복을 보지 못하고 운명하신 날입니다

102년 전 오늘인 1917년 3월 2일, 고종의 밀명을 받아 헤이그 특사로 파견됐던 이상설이 끝내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인사이트이상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사이트] 함철민 기자 = 102년 전 오늘(2일)은 고종의 밀사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됐던 이상설이 광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날이다.


1870년 충북 진천에서 태어난 그는 25세에 조선 마지막 과거에 합격해 27세에는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교수와 관장을 역임할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다. 


이후 그가 관직을 사임하고 근대 학문을 연마하고 있을 때쯤 조선의 운명은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다. 급기야 1905년에는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외교권까지 빼앗기게 됐다. 


이에 자결까지 시도했던 그는 1906년 해외로 망명해 조선의 국권 회복을 위한 노력을 부단히 펼쳤다. 


인사이트헤이그특사(이준, 이상설, 이위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중 하나가 고종의 밀명을 받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렸던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것이었다. 


일본의 방해로 회의장 문턱을 넘지는 못했지만, 이역만리 타국땅에서 외친 그의 목소리는 조선의 청년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청년 안중근도 그중 하나였다.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살해한 안중근은 옥중에서도 "동양평화주의자로서 이상설 선생만큼 친밀한 마음을 가진 자는 없다"라며 이상설에 대한 존경을 숨기지 않았다. 


인사이트을사늑약이 체결됐던 덕수궁 중명전 / 미국 코넬대학교 도서관


1910년 나라를 빼앗긴 이후에도 중국과 러시아를 오가며 독립을 향한 열망을 키워갔던 그는 1917년 러시아 니콜리스크(현재 우수리스크)에서 건강 악화로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임종을 앞둔 그는 동지들에게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임종을 지켰던 그의 동지들은 유언에 따라 아무르강 강가에 장작을 쌓아놓고 화장한 후, 그 재를 북해 바다에 날렸다. 


정부는 이상설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