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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오늘, 일제의 총부리 앞에서도 한반도 곳곳에서 '대한 독립 만세' 외침이 터져 나왔다"

1919년 3월 1일, 전국 주요 도시 일곱 군데에서 만세 시위가 발생했다.

인사이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사이트] 김천 기자 =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에 위치한 탑골 공원에서는 학생들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조선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가두 행진을 했다.


같은 시각 민족 대표 33인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서울 종로구 인사동 태화관 앞에서 독립 선언식을 가졌다.


시위는 서울 외 6곳의 도시(평양, 진남포, 안주, 선천, 의주, 원산)에서도 일어났다. 주요 도시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는 시작과 동시에 인근 지역으로 크게 확산하기 시작했다.


농촌에서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날에 장터를 중심으로 발생했다. 주요 도시 번화가에서는 독립선언식이 거행됐다.


인사이트체포·압송되는 3.1운동 주요 학생들 모습 / 독립기념관


만세 운동은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많은 조선인이 폭발적으로 동참했고, 4월 초순까지 매일 60여 차례에 이르는 시위가 벌어졌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인구의 10%에 달하는 200만여 명이 만세 시위에 동참했다. 


이 중 7,509명이 일본의 무력 진압에 의해 살해당했고 1만 5,850명이 부상했다.


경찰에 검거된 이는 무려 4만 6,000여 명에 달했다. 검찰에 송치된 이들은 1만 9,054명이었고, 7,819명이 유죄판결을 받아 형을 살았다.


비록 만세운동의 끝은 일본의 폭력적인 진압으로 끝을 맺었다. 하지만 3.1운동은 민족마다 자유와 평등을 누려야 한다는 끈질긴 독립 투쟁으로 이어졌고,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본이 되는 정신이 됐다.


인사이트덕수궁 대한문 앞 만세 시위 / 독립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