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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년전 오늘은 '독립신문'을 창간했던 서재필 선생이 숨을 거둔 날입니다

1951년 1월 5일, 허장성세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며 국민의 계몽을 부르짖었던 서재필 선생이 숨을 거뒀다.

인사이트서재필·안창호 / 연합뉴스


[인사이트] 황기현 기자 = "2천 만 민중이 총궐기하여 독립을 부르짖게 되면 한국의 독립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1951년 1월 5일, 허장성세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며 국민의 계몽을 부르짖었던 서재필 선생이 숨을 거뒀다.


조선 철종 시절이었던 1864년 1월 7일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난 서재필은 어린 시절부터 총명함을 드러냈다고 한다.


실제 19세에 불과한 나이로 과거 시험에 합격해 관직에 나갈 정도였으니 이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인사이트독립문 / 연합뉴스


이후 그는 당대의 석학으로 꼽히던 김옥균·서광범·홍영식·박영효 등 개화파의 핵심인물들과 어울리며 넓은 세상에 눈을 떴다.


그리고 개화와 개혁을 통한 부국강병을 꿈꾸던 서재필은 개화파 인사들과 함께 1884년 12월 우정국 개국 축하연이 있던 날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 처단에 나선다.


그러나 정변이 3일 천하로 돌아가 버리자 서재필은 뜻을 함께했던 개화파 인사들과 함께 일본을 거쳐 1885년 4월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때 국내에서는 서재필의 가족이 역적으로 몰려 음독자살하거나 참형(목을 베는 형벌)을 당했고 두살배기 아들은 굶어 죽는 아픔을 겪었다.


인사이트독립신문 / 연합뉴스


참담한 마음을 추스르며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서재필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영어 공부를 하며 현지 적응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중 한 독지가의 도움을 받아 서구 학문을 배우고 의과대에 진학해 개인 병원을 차리며 생활하게 됐다.


이처럼 만리타향에서 의사로 일하던 서재필을 다시 조선 땅에 불러들인 것은 개화파 동료들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갑오경장으로 개혁이 단행되며 갑신정변 주도자에 대한 역적 누명이 벗겨진 상황이었다.


인사이트대한민국임시정부 3년 임시정부의정원 / 국가보훈처


고국을 떠난 지 10여 년 만에 귀국한 서재필은 미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민계몽에 힘쓰기 시작했다.


실제 그는 독립을 위해서는 교육과 계몽이 필수라고 여기고 1896년 4월 7일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대중신문 '독립신문'을 창간한다.


'독립신문'은 순 한글로 쓰여졌는데, 이에 대해 서재필은 "한문이 아닌 국문으로 쓰는 것은 상하 귀천이 다 보게 하기 위함이다"라는 이유를 밝혔다.


독립신문에 실린 기사와 논설을 통해 국민의 자주 독립의식을 높이고 열강의 침탈에 반대했던 그는 같은 해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인사이트연합뉴스


그리고 서재필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그러나 수구파 정부와 열강의 이권침탈을 비판하던 그는 기득권 세력에게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미국으로 추방당해 펜실베니아에서 병원을 개원해 의사로서의 삶을 지냈다.


그러던 중 그는 1919년 일어난 3·1 운동에 전 재산을 지원했다.


인사이트연합뉴스 


또 먼 타국에서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세계에 호소하는 등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규탄을 이어갔다.


실제 1952년 하와의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태평양회의에서 서재필은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기도 했다.


이처럼 전 재산을 독립에 바친 그는 말년을 궁핍하게 보낸 것으로 전해졌다.


그럼에도 미국 내 한인들에게 독립운동의 원로 역할을 톡톡히 하던 그는 광복 후 83세 나이에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기도 했다.


인사이트연합뉴스


하지만 이를 거절한 서재필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1951년 1월 5일 87세 나이로 숨을 거뒀다.


나라의 독립과 국민의 앎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서재필 선생. 그의 숭고한 뜻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디딤돌이 됐다.


'노비'출신으로 독립운동 투신해 안중근 의사 도운 최재형 선생최근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생계 지원금 신청 안내서를 보낸 것으로 확인된 가운데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던 최재형 선생의 일화가 함께 화제되고 있다.


황기현 기자 kihyun@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