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10일 공개한 2025년 사업보고서는 단순한 실적 정리 문서가 아니다. 지난해 연구개발비 37조 7천억원, 시설투자 52조 7천억원, HBM4 수요 대응, 알파벳의 5대 매출처 신규 진입까지 담겼다.
시설투자는 당초 계획보다 5조원 넘게 늘었고, 올해도 HBM4 고객 수요에 계속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명시했다. 시장은 이를 삼성전자가 AI 반도체 수요 확대의 한복판에 들어섰다는 신호로 읽고 있다.
하지만 이 사업보고서가 보여준 것은 HBM 호황 자체보다 '더 큰 변화'다. AI 전쟁의 핵심이 더는 칩 공급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알파벳이 삼성전자의 5대 매출처에 새로 이름을 올렸다는 것은 글로벌 빅테크의 AI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가 이미 삼성전자 매출 구조에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반도체 수요가 실제 설비 투자와 장기 발주로 이어지려면 칩 못지않게 전력망과 백업전원, 냉각 인프라가 같이 움직여야 한다. HBM4를 더 많이 만들어도 데이터센터가 이를 안정적으로 돌릴 전기와 열관리 체계를 확보하지 못하면 AI 투자도 결국 병목에 걸린다.
글로벌 흐름은 이미 한발 앞서 있다. 국제에너지기구는 전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소비가 2030년 945TWh 수준으로 늘어 2024년 대비 두 배 가까이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2024년부터 2030년까지 연평균 증가율은 약 15%로, 다른 부문 전체 전력수요 증가보다 훨씬 빠르다. AI가 데이터센터 전력수요 급증의 핵심 동력이라는 점도 분명히 짚었다. AI 산업이 확대될수록 더 필요한 것은 칩만이 아니다. 그 칩을 돌릴 전기와 송배전 설비, 저장장치와 냉각 설비까지 함께 늘어나야 한다.
미국 빅테크의 움직임도 같은 방향이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아마존, 오픈AI는 이달 백악관에서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를 일반 소비자에게 떠넘기지 않겠다며 신규 전력원 확보와 전력 인프라 업그레이드 비용을 직접 부담하겠다는 서약에 참여했다.
AI 데이터센터를 짓는 기업이 전기 문제까지 스스로 풀어야 한다는 인식이 공개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10일 자국의 원전 기반 전력 여력을 AI 데이터센터 경쟁력과 연결해 설명했다. AI 패권 경쟁이 반도체 보조금 경쟁을 넘어, 전기를 얼마나 안정적으로 확보하느냐의 싸움으로 옮겨졌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로이터는 지난달 오픈AI와 삼성SDS, SK텔레콤이 한국에서 초기 20MW 규모의 데이터센터 구축을 준비 중이라고 전했다. 데이터센터 증설이 이어질수록 변압기와 차단기, 송배전 설비, UPS, ESS, 냉각 시스템, 장기 전력계약 등 이른바 '서버실 뒤편 산업'의 중요성도 함께 커진다.
삼성전자 사업보고서는 HBM 시대의 수혜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 다음 '질문'도 던졌다.
"AI 반도체 수요가 실제 매출과 장기 성장으로 이어지려면 전력 인프라가 받쳐줘야 한다"
시장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HBM 경쟁만 보고 있다면 아직 절반만 본 셈이다. 다음 승부처는 전력실과 변전소, 냉각 설비, 저장장치, 그리고 이를 지탱하는 산업 인프라 전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