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빨간 뚜껑 소주'를 곁들이며 요리 철학을 논하던 최강록 셰프의 모습은 2030 세대에게 묘한 해방감을 선사했습니다.
미식의 정점에서 결국 가장 투박하고 술 한 잔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모습, 우리는 거기서 꾸며내지 않은 '진짜'의 향기를 맡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역사 속 영웅 이순신에게도 이와 닮은 풍경이 있었습니다.
성웅(聖雄)이라는 거창한 박제 뒤에 가려진, 전쟁이라는 비릿한 고통을 독한 술 한 잔으로 잠재우던 '인간 이순신'의 페이소스 가득한 술상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이순신은 흔들림 없는 강철의 화신이지만, 그의 내밀한 고백인 '난중일기' 속에는 술에 기대어 하루를 버텨낸 한 인간의 고독이 고스란히 박혀 있습니다.
"비가 몹시 내렸다. 홀로 빈집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어지러웠다. 술을 취하도록 마셨다(1596년 1월 3일)"
"저녁에 소주를 마시는데 취하여 촛불을 켠 채로 잠들었다(1593년 7월 6일)"
여기서 등장하는 '소주'는 지금의 희석식 소주와는 궤를 달리하는 고도수의 증류주, 즉 목줄기를 타고 흐르는 서늘한 불(火)이었습니다.
살을 에이는 밤바다의 추위와 자신을 믿지 못하는 조정의 압박 속에서, 장군에게 소주는 잠시나마 현실의 무게를 덜어주는 수단 가운데 하나였던 셈입니다.
장군의 술상은 화려하지 않았으나 늘 사람이 머물렀습니다.
"여러 장수들과 술을 마시며 밤 깊도록 이야기했다(1595년 5월 1일)"는 기록처럼,그는 큰 전투를 앞두거나 마친 뒤 술잔을 매개로 부하들과 속내를 나누곤 했습니다.
장군은 마른 생선, 어물(魚物), 생선, 젓갈류 등 해산물을 곁들여 병사들과 술을 나누며 고단함을 덜어주곤 했습니다.
촛불 아래서 취해 잠들 정도로 고단했던 리더의 밤은, 역설적으로 다음 날 적진을 향해 나갈 용기를 충전하는 엄숙한 의식과도 같았습니다.
퇴근길 편의점에서 빨간 뚜껑 소주 한 병을 집어 드는 우리의 손길은, 430년 전 촛불을 켜고 술잔을 기울이던 장군의 마음과 어딘가 닮아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회라는 거대한 전쟁터에서 치열한 하루를 보낸 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내 안의 고독을 독한 술 한 잔으로 정화하는 행위는 시간을 뛰어넘어 공명합니다.
술은 때로 사람을 망치기도 하지만, 이순신과 최강록의 사례처럼 때로는 가장 정직하게 나 자신을 마주하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밤, 유난히 고단한 하루를 보냈다면 장군의 술상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기교 없는 정공법으로 세상을 상대하고, 묵직한 술 한 잔으로 하루의 먼지를 털어내던 그 '곤조' 있는 태도를 말입니다.
촛불을 켠 채 취해 잠들지언정 끝내 굴복하지 않았던 장군처럼, 당신이 들이켜는 그 술잔은 내일의 전장으로 다시 나갈 나 자신을 향한 가장 뜨거운 위로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