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함철민 기자 = 1506년 11월 20일, 향년 29세였던 조선의 왕이 강화도 유배지에서 목숨이 다해 쓸쓸하게 죽었다.
신하들에게 폐위당한 그의 무덤은 '능'이 아닌 '묘'가 됐다.
연산군, 재위 중 사치와 향락을 일삼고 국정을 돌보지 않아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그는 색욕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표적인 일화가 '흥청망청'이다. 돈이나 물건을 마구 사용하거나 흥에 겨워 마음대로 즐기는 것을 뜻하는 이 말은 연산군 때 궁궐에서 직접 뽑았던 기녀 '흥청'에서 유래했다.
연산군은 '채홍사와 채청사'라는 관리를 임명해 전국에 미녀를 뽑아오게 했다. 채홍사는 예쁜 미녀를, 채청사는 젊은 여성을 뽑는 관리였다.
기준은 단 한 가지 '외모'였다.
양반집 여성은 물론 이제 막 결혼한 새색시도 얼굴이 예쁘다는 이유로 끌려갔다. 그중에는 임산부도 있었는데 이들이 몰래 아이를 낳으면 빼앗아 생매장시켰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뽑힌 여성들을 '운평'이라고 불렸으며 그 수만 1만 명에 달한다고 전해진다. 이 중 예쁘고 노래와 춤을 잘하는 자들을 뽑아 '흥청'이라고 이름을 붙었다.
흥청들은 성균관에서 지내면서 왕과의 동침을 위한 여러 가지 훈련을 받았다. 뒤꿈치를 들고 걷기, 배꼽으로 얼음물 받기, 혀로 홍시 핥아먹기 등이다.
흥청들에게는 노비와 땅을 주고, 세금을 면제해 줬다.
결국에는 기생이 자랑이 되는 세상이 됐다. 흥청을 둔 집안은 뇌물을 받으며 엄청난 권력을 행사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장녹수다.
기생의 지위에서 후궁의 자리까지 오른 장녹수는 연산군의 총애를 업고 권력을 함부로 휘둘렀다. 실록은 "상을 주고 벌을 주는 일이 모두 그(장녹수)의 입에 달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연산군은 이런 흥청들과 관계를 즐겼다. 기록에 따르면 하룻밤에 11명과 합방을 하기도 했다. 길을 가다가도 예쁜 여성을 발견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성관계를 했다.
연산군의 최측근이었던 내시 김처선은 연산군에게 선왕 중에서도 이토록 풍기문란을 일으키고 폭정을 일삼는 임금은 없었다고 간언했다가 죽음을 당했다.
결국 연산군은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폐위됐다. 장녹수는 길에서 사람들이 던진 돌을 맞아야 했다.
연산군은 강화도로 유배를 가서 최후를 맞이했다. 절대 왕권을 휘두르며 흥청망청 놀고 먹으면서 제멋대로 살던 시절과는 정반대의 최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