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 부자로 태어나 '수백억 전재산' 독립운동에 썼다가 쓸쓸히 '굶어 죽은' 6형제
600억을 호가하는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쓰고 정작 본인들은 굶어 죽은 여섯 형제의 사연을 전한다.
[인사이트] 황효정 기자 = 66년 전 오늘인 1953년 4월 17일,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쓸쓸히 숨을 거둔다.
죽기 전 노인은 먼저 떠나간 가족들을 떠올린다. 그중에서도 친구처럼, 때로는 부모처럼 의지했던 형들을 떠올렸다. 고문사, 병사, 객사도 모자라 굶어 죽기까지 했던 형들...
독립운동가 성재 이시영 선생은 6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선생의 집안은 구한말 당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부호이자 명문가였다. 당시 서울 명동을 지나려면 이들 형제 가문 소유의 땅을 밟지 않을 수 없다고 할 정도였다.
이런 선생의 집안은 끊임없이 일제의 친일 회유를 받았다. 다른 형들과 마찬가지로 선생은 일제와 뜻을 같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일제의 유혹은 끈질겼고, 고민하던 이들 6형제는 전 재산을 원래 가치의 절반가량으로 후려쳐 급히 처분하기에 이른다.
제값을 받지 못했음에도 형제들이 판 집안의 전 재산은 당시 소 값으로 1만 3,000마리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오늘날 소 시세가 한 마리에 500만원이라 치면, 약 650억(실은 650억의 두 배)의 재산을 보유했다는 소리다.
650억을 들고 여섯 형제는 서울을 떠나 만주로 망명했다. 독립운동을 위해서였다.
독립군 양성 학교인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들은 이후 상해로 다시 거처를 옮겨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에 참여했다.
학교 운영,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을 토지 매입, 운동에 참여한 이들을 먹여 살릴 식비 등에 전 재산을 쓴 형제들은 이때 파산에 이르며 엄청난 생활고를 겪는다.
독립운동이 발각돼 고문을 받기도 했다. 형제 중 넷째 이회영 선생은 일제에 체포돼 뤼순 감옥에서 고문사했다.
다른 형제들 또한 일제의 감시 속에 병사, 객사, 또는 굶어 죽는 아사로 세상을 떠났다. 시신도 찾지 못한 채 실종된 형제도 있었다.
1945년 조국이 해방하고 돌아와 다시 우리 땅을 밟은 이는 결국 막내, 이시영 선생뿐이었다. 물론 선생도 죽는 날까지 가난에 시달리다 눈을 감았다.
부와 권력을 쥐고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음에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6형제. 형제들의 자녀들도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들 가족은 그 대가로 고되고 혹독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리고 여섯 형제의 후손들 또한 오늘날 대부분이 여전히 기초생활수급자 등으로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