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이 다시 피길"...화마가 집어 삼킨 집터에서 만난 할머니의 작은 소망

지난 11일 방문한 고성 산불 피해 현장은 잿가루만 날리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입력 2019-04-13 11:38:16
사진=박찬하 기자 chanha@


[인사이트] 김천 기자 = 산불이 지나간 강원도 고성은 '처참' 그 자체였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은 허망함에 주저앉아 눈시울만 붉혔다.


지난 11일 오전, 강원도 고성을 방문했다. 맑은 하늘 아래 멀리서부터 불에 그을린 산이 눈에 들어왔다. 한참 푸르러야 할 산은 불에 타 검은 민머리만 내밀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최악의 재난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화마는 작은 마을 곳곳까지 덮쳤다. 인근 한 마을에 들어서니 재난 현장의 참담함이 피부로 느껴졌다.


마을 입구에 놓인 컨테이너 창고는 뜨거운 불길에 구겨졌다. 벽돌로 쌓은 주택은 담벼락만 남은 채 무너져 내렸고 하얗던 건물은 하얀색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생계를 담당했을 농기계는 화염 속에 달궈져 제 기능을 잃었고 농부의 장화는 녹아내려 굳어 있었다. 매캐한 탄내는 아직까지 남아 코끝을 찔렀다.


사진=박찬하 기자 chanha@


마을 주민들은 지난 6일 저녁, 갑자기 산불이 닥쳐왔다고 했다. 산불로 피해를 본 이들은 살곳을 잃고 마을회관을 임시주거지 삼아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회관을 방문하니 한켠엔 이재민들이 무기력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두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넋이 나간 듯한 모습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이재민들에게 말 한마디 걸기도 조심스러웠다.


이재민 중에는 불안을 호소하며 의료 지원을 요청하는 이도 있었다. 한 이재민은 가만히 있어도 가슴이 쿵쾅거려 잠을 못 이루겠다고 했다. 다른 이재민은 종종 심장이 쥐어짜듯 아프다고 전했다. 이들은 갑작스레 닥쳐온 재난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며 하소연 했다.


평생을 한 집에 살며 아들 둘, 딸 둘을 키워냈다는 전모(82) 할머니는 "집 안방에서 TV를 보다 '불이야'라는 소리를 듣고 창밖을 내다봤다"면서 "밖을 보니 온 세상이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고 회상했다.


설명에 따르면 전 할머니는 당시 창문 안까지 들어오려는 불길을 피해 신발도 신지 못한 채 허겁지겁 밖으로 뛰쳐나왔다.


밖을 나와서 보니 불길은 집까지 번진 뒤였다. 강풍을 타고 한순간에 창문으로 들어온 불은 집 안쪽부터 살림을 태우기 시작했다. 집 안에서부터 창밖으로 불길이 치솟자 할머니는 허망함에 다리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고 설명했다.


사진=박찬하 기자 chanha@


전 할머니는 "활활 타오르는 집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땅만 내리쳤다"면서 "불길에 휩싸인 집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우뚱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결국 30여 분 만에 무너져 내렸다. 80여 년을 살아온 집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작년에 남편을 떠나보낸 할머니에게 연달아 닥친 시련이었다. 


그는 "남편이랑 함께 집을 만들던 기억이 생생한데 남편도, 집도 모두 사라졌다. 이제 어떻게, 무슨 낙으로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면서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할머니는 인터뷰하는 내내 울컥하는 감정에 말을 잇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불길이 거세 집에 있던 소화기도 사용하지 못하고 뛰쳐나왔다는 장모(83) 할머니는 끔찍했던 산불의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았는지 손사래를 쳤다. 실제 장 할머니의 집 현관문에는 불길에 그을린 검은 소화기가 안전핀도 뽑히지 않은 채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는 "논농사를 지을 농기구마저 불에 모두 타버려 사용할 수 없게 됐다"며 "집도 잃고 생계를 이어갈 수단마저 사라져 막막하다"고 전했다. 장 할머니는 삶에 대한 희망마저 불길과 함께 사라졌 다며 망연자실했다.


사진=박찬하 기자 chanha@


열다섯에 6.25 전쟁을 겪었던 할머니는 이번 산불이 마치 전쟁 때를 방불케 했다고 설명했다.


추모(84) 할머니는 "마을 인근에 폭탄이 떨어져서 이곳저곳에서 불이 났는데,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면서 "산불 때 난리통이 6.25전쟁과 똑같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산불로 모든 걸 잃어서 참담한 심정이다. 빠른 시일 내 삶의 터전이 복원됐으면 하는 마음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11일 중앙재난피해합동조사단에 따르면 강원 영동산불로 인한 피해 면적은 산림 1,757ha이며 소실 주택은 516채다. 1명이 숨지고 1명이 부상했으며 1,205명의 이재민이 발생해 819명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임시 거주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다.


정부는 오는 16일까지 피해조사를 완료한 뒤 무료로 임시 거주할 수 있는 조립주택(24㎡)을 설치·지원할 예정이다. 


또 농사에 필요한 육묘와 농기구를 무상으로 지원하고 산불로 인한 폐기물 처리는 전액 국고로 지원할 방침이다.









사진=박찬하 기자 chanh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