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김다솜 기자 =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많다.
바로 75년전 오늘(13일), 일제의 고문 때문에 생긴 후유증으로 순국한 故 김마리아 선생이 그 가운데 1명이다.
그는 일제가 3·1운동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한 핵심이자 독립운동에 지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지난 1892년 6월 18일, 황해도 장연군에서 태어난 김마리아 선생은 연동 여학교를 다니면서 민족정신을 품었다.
이후 일본에서 유학하던 1919년, 2·8 독립 선언이 거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비밀리에 귀국해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독립선언문 10여 장을 옷 속에 감추고 입국해 이를 전국 곳곳으로 나르며 독립운동에 열을 다했다.
3·1 운동이 발발한 뒤에는 항일 부녀단체 조직을 계획하다가 일본에 발각돼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기도 했다. 6개월간 갖은 고문을 받았다.
일제는 6개월 동안 악독하게 김 선생을 고문했지만, 굴복시키지 못했다. 출소 후에도 애국부인회를 만드는 등 활동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그런데 이때, 3·1 운동에 참여하며 독립운동에 힘쓰던 오현주가 독립이 불투명해지자 친일파로 돌아서 애국부인회를 일본 경찰에 밀고했다.
결국 다시 체포된 김마리아 선생은 끔찍한 고문을 당해야 했다. 이때 당한 고문은 앞서 받았던 고문보다 훨씬 더 악독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고문을 받은 탓에 김 선생의 건강은 엄청나게 악화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김 선생의 독립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당시 김 선생을 심문했던 일본 검사는 숱한 고문에도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그에게 감동했다.
"너는 영웅이다. 너보다도 너를 낳은 네 어머니가 더 영웅이다"
김마리아 선생은 일본인이 조선인을 두고 '영웅'이라고 부를만한 인물이었다.
김마리아 선생은 이후 끔찍한 고문으로 건강이 악화하자 병보석을 받아 입원 치료를 받게 됐다.
그는 또다시 일본의 감시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단체인 '근화회'를 조직했으며 1933년에는 다시 조선으로 귀국해 항일 투쟁을 계속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김구 선생과 황해도 의정원으로도 활동하며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쳤지만 결국 독립을 1년 앞둔 1944년 3월 13일, 끔찍한 고문후유증으로 생을 마감했다.
비록 그토록 그리던 광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지만,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되찾고 싶었던 그의 굳은 의지와 정신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