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김다솜 기자 =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59년 전 오늘(28일)은 대구지역 8개 고교 학생들이 자유당의 독재와 불의에 항거해 시위를 일으킨 날이다.
이 사건은 4·19 혁명의 기폭제, 한국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배경은 이렇다. 1960년 2월 28일, 일요일이었던 그날은 대구 수성천변에서 3·15 부정선거에 앞서 야당 부통령 후보인 장면 박사의 선거 연설이 계획돼 있었다.
당시 자유당 정부는 대구 지역 학생들이 장면 박사의 유세장에 몰려서 언론의 주목을 받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자유당 정부는 이를 방지하고자 대구 시내 공립 고등학교에 일요 등교를 지시하거나 임시시험을 본다는 등 각종 핑계로 등교를 종용했다.
그런데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기 전날이자 유세 전날인 27일 경북고 학생들이 이런 자유당의 꼼수를 간파했다. 학생들은 "학원을 정치 도구화 하지 말라!"고 소리치며 거리 시위를 벌였다.
또 같은 날 오후 대구 동인동 이대우 경북고 학생부 위원장의 집에 경북고, 대구고, 경북대 부속고 학생 8명이 모였다. 이들은 부당한 일요 등교 지시에 항의하기 위해 시위를 조직했고, 결의문을 작성했다.
그리고 마침내 2월 28일, 이들은 교사들의 만류에도 학교를 뛰쳐나가 자유당의 불의와 부정을 규탄하는 집회를 일으키며 궐기했다.
800명으로 시작했던 학생 시위대는 다른 학교 학생들이 합류하며 커졌고, 도중에 유세장으로 가던 장면 박사를 만났을 땐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이런 행동에 당시 경상북도지사와 치안국장은 학생들이 북한에 이용당하고 있다며 '종북몰이'를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오히려 시민들은 구타당하는 학생들을 보고 경찰에게 달려들어 뜯어말리는 등 학생들을 격려했다.
결과적으로 이 시위엔 8개 학교 총 1,200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했으며 그중 120여 명은 경찰에 체포돼 처벌받기도 했다.
이 사건은 언론에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처럼 반독재의 횃불이 대구에서 '학생'들에 의해 처음 불타오른 것이다.
그리고 이 움직임은 1960년 4·19 혁명으로까지 이어지면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으며, 그 이후 민주화 운동에도 영향력을 미쳤다.
불의와 부정에 항거해 자발적으로 민주화 운동을 펼쳤던 그들. 오늘 이들의 역사적 의의와 정신을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게 어떨까.
한편 오늘(28일) 대구지방보훈청은 1960년 대구지역 학생들이 독재와 부정선거에 맞섰던 2·28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기념식을 개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