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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이 '서류 안내줘서'...민원인 파산·자살

공무원이 허가서류를 내주지 않아 민원인의 사업이 파산하고 이에 대한 항의로 방화, 자살까지 하자 인사혁신처가 최대 파면까지 할 수 있는 대책을 내놓았다.


 

공무원들의 뿌리 깊은 복지부동이 위험 수위를 치닫고 있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인허가를 거부하거나 민원서류를 장기간 방치하는 사례가 부지기수다. 

 

이 때문에 민원인들이 파산 위기에 처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피해가 속출한다. 

 

보신주의와 무사안일 관행이 굳어져 생긴 공직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다. 공무원의 갑질 행각이 가장 심한 곳은 지방자치단체다. 

 

인허가 결정 때 중앙정부 유권해석과 법령 대신에 공무원 재량을 우선시한 탓에 민원인들이 골탕먹기 일쑤다. 

 

국민의 공복이 아니라 군림자 행세를 하는 모양새다. 

 

국민의 뜻을 최대한 반영하겠다는 취지에서 21년 전 도입한 지자체가 국민 불편을 가중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급기야 인사혁신처는 최근 극약 처방을 내놨다. 업무를 게을리하거나 거부하는 '소극행정' 공무원을 파면할 수 있도록 공무원징계령 시행규칙 개정안을 마련한 것이다. 

 

공무원 갑질 풍토가 임계치를 넘었다는 판단에서다. 정부의 고강도 혁신조치가 공직문화를 바로잡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공무원노조의 저항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 공무원 '41개월 서류 트집'에 결국 사업 무산

 

기업인 A씨는 최근 파산 위기를 맞았다. 충남에 있는 자기 땅에 태양광 발전소와 부품 공장을 세우려다가 좌절된 탓이다. 

 

인허가 담당 공무원의 트집이 원인이었다. A씨가 관할 시청에 발전소와 공장 건립 신청서를 낸 것은 2011년이다.

 

담당 공무원은 각종 이유를 대며 15번 넘게 서류 보완을 요구했다. 

 

진입로에 50m마다 차량이 교행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라는 요구도 했다. 법에도 없는 조건을 들이댄 것이다. 국토부와 행정자치부가 교행 공간이 필요 없다는 유권해석을 내렸지만 '소귀에 경 읽기' 였다.

 

담당 공무원의 막무가내에 A씨는 발만 동동 굴렸다. 결국, 신청서를 낸 지 3년 5개월 만인 지난해 4월 공장 설립이 불가능하다는 통지를 받았다. 41개월간 헛고생을 한 것이다. 

 

그런데도 해당 시청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당당한 태도를 보인다. 

 

시 관계자는 9일 "행정 절차상 문제없다. 민원인을 도와주려고 서류를 이것저것 보완하도록 요구했는데 중간에 스스로 포기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강원도 강릉시도 시유지 매각을 5년간 미루다가 결국 무산될 위기에 처한 사실이 확인됐다. 

 

감사원이 이달 3일 공개한 '소극적 업무처리 등 민원사항 점검' 결과를 보면 소극행정의 전모를 알 수 있다. 강릉시는 2009년 6월 한 민간업체를 강릉개발촉진지구 내 버섯재배단지 사업시행자로 지정했다.

 

이 업체는 3억1천여만원을 주고 사업부지 가운데 사유지 2만4천여㎡를 매입했다. 2011년 1월에는 시유지 3만1천여㎡의 매수를 신청했다.

 

그러나 담당 공무원의 높은 벽에 걸려 사업은 좌초됐다. 매각절차를 맘대로 중단하고서 2013년 1월 특혜 우려가 있다면서 매각 불가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사업 시행자는 행정 지원을 눈물로 호소하고 항의도 했지만 끝내 무위로 그쳤다.

 

강원도에서는 인사 발령을 받은 공무원이 업무 인계를 제대로 하지 않아 민원인이 골탕을 먹기도 했다.

 

한 업체가 토석 채취허가 연장을 요청했다가 민원처리 기간인 30일을 훌쩍 넘겨 무려 441일 만에 허가를 얻었다. 담당 공무원이 업무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후임자에게 넘기지도 않은 채 자리를 옮긴 탓이다. 

 

공무원 갑질에는 대법원 판례도 통하지 않는다.

 

경기도의 한 기초지자체는 2011년 한 기업 숙박시설 건축허가 신청을 '주거환경 저해'를 이유로 돌려보냈다. 

 

기업은 대법원까지 가는 소송 끝에 2014년 1월 행정처분이 부당하다는 판결을 받았다. 해당 지역에 숙박시설 허가를 제한하는 법령이 없고 거주환경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해당 시는 패소 후에도 주민 반대를 이유로 버텼고 기업은 결국 사업을 포기했다. 

 

광주시 광산구는 2014년 8월 모 레미콘 회사의 공장 신축 허가를 거부했다. 민원이 발생한다는 게 이유였다. 인천 송도는 LNG기지 증설에 반대하는 집단 민원을 이유로 한국가스공사의 건축허가 신청을 6차례나 반려했다.

 

 

◇ 공무원 갑질에 '방화'에서 '자살'까지

 

공무원 갑질이나 민원 처리 불만 등에 억울함을 견디지 못한 민원인이 목숨을 끊기도 했다.

 

지난해 1월 5일 전남 해남군 주민 B씨가 집에서 음독으로 숨졌다.

 

B씨는 해남군청 공무원 3명의 이름을 거론하며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유서를 남겼다. 이들이 자택 앞 신축 건물주와 유착됐을 것이라는 의심도 했다. 해남군은 민원인이 요구한 대로 공정하게 처리했다고 해명할 뿐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 .

 

2013년 12월에는 전남 여수시청 앞에서 정모씨가 인화성 물질을 들고 분신 소동을 벌였다. 전남도가 인정한 바지락 양식장 허가를 여수시가 승인하지 않아 어장이 황폐했다는 이유에서다.

 

지난해 11월에는 여수시 행정에 불만을 품은 50대 민원인이 차량을 몰고 시청 건물에 돌진했다. 차량이 불에 타고 자신은 중상을 입었다.

 

이 민원인의 아내도 다른 차량에 인화성 물질을 싣고 와서 직원들에게 시너를 뿌리는 등 거세게 항의했다.

 

택지개발지구내 토지 수용과 관련한 행정처리에 강한 불만을 느꼈기 때문이다. 

 

◇ 복지부동·눈치보기 만연해도 감사관도 속수무책 

 

행정처리 불만과 항의 원인은 공무원의 복지부동, 단체장 눈치보기 등이 대부분이다. 

 

이런 문제를 해소하려고 외부에서 감사관을 채용했지만 무용지물이다. 공무원노조가 '무언의 압력'을 행사한 때문이다.

 

서울의 한 자치구 공무원노조는 지난 1월 말 6급 이상 조합원들에게 인사 관련 설문조사를 했다.

 

개방형 감사관에 누구를 뽑느냐는 질문에 54%가 '우리 구 감사근무 출신자'라고 답했다. 5.7%만이 현재 감사관과 재계약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노조는 이런 결과를 구청장에게 전달하면서 사실상 감사관 교체를 압박했다.

 

감사관이 시간외근무수당과 출장여비 부풀리기 등을 조사하려고 하자 노조가 보복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구청 주변에서 나온다.

 

지자체들은 복지부동 등을 막기 위해 각종 대책을 만들었지만 대부분 요식행위로 그쳤다. 공직사회의 갑질 행태가 악화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인사혁신처는 이러한 공직문화를 혁신하기 위해 지난 7일 '공무원 징계령 시행규칙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소극행정을 하는 공무원에게 징계 감경을 할 수 없도록 하고 고의성이 있으면 최대 파면까지 한다는 내용이다.

 

소극행정은 공무원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거나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아 국민에게 불편을 주거나 권익을 침해하고 국가재정에 손실을 입히는 행태를 뜻한다. 

 

이러한 '극약처방'은 공무원들이 자초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채찍 위주의 혁신보다는 당근을 제시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화여대 행정학과 박정수 교수는 "복지부동 등 소극적 행정은 어떻게 하면 피해를 거부하는지에 대한 학습 결과물이 아니겠느냐"며 "공무원에게 벌을 주기보다는 성과연봉제 등을 도입해 적극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공무원에게 상을 주는 방향으로 공직사회의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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