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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때 북한군에 밀리자 총들고 적진으로 돌진해 나라 구한 백선엽 장군의 '레전드' 일화

6·25 전쟁 당시 제1사단을 이끌며 수많은 전투에서 눈부신 전공과 업적을 쌓은 우리나라 최초 대장 백선엽 장군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인사이트백선엽 장군에게 경례하는 로버트 에이브럼스 한미연합사령관 / 뉴스1


[인사이트] 함철민 기자 = 6·25전쟁은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아픔 중 하나다. 민족끼리 서로 총부리를 겨뤄야 했고, 그 총탄에 형제·자매들이 목숨을 잃어갔다. 


그 과정에서 북한 인민군의 엄청난 공세 속에 국군은 경남 내륙까지 쫓겨가야 했고 대한민국이 존폐의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이 위기의 상황에서 대한민국을 구해낸 인물이 바로 백선엽 예비역 대장이다. 


올해 100세를 맞이한 백 장군은 한국 전쟁사의 전설 같은 인물이다. 32세의 나이로 국군 최초로 대장에 오른 야전 사령관이며 육군참모총장을 2번이나 역임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 친일 행위를 하며 오점을 남기긴 했으나, 6·25 전쟁 당시 나라를 구한 그의 업적만큼은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그의 전설적인 일화는 지금까지 전해져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그가 전설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 5가지를 소개한다. 


1. 개전 초기 인민군 주력 부대의 진격 저지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당시 38선 이남을 지키던 대다수의 부대가 북한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남으로 퇴각했다. 


이때 북한군의 남하를 끝까지 저지하던 부대가 있었으니 개성 부근 경비를 담당하던 1사단과 춘천의 6사단, 강릉의 8사단이었다. 


이 중 1사단의 지휘관이 백선엽이었다. 


당시 대령이었던 그는 인민군 주력부대의 집중 공격을 받으면서도 부대를 끝까지 유지하며 북한 방호산 소장이 이끄는 인민군 6사단의 서울 진입을 3일간 저지했다.


그가 전방에서 부하들과 함께 버텨준 시간 때문에 당시 이승만 정부는 안전하게 서울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2. 다부동 전투 '사단장 돌격'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MBC '로드 넘버 원'


1950년 8월 국군은 개전 두 달이 채 안 돼 경남 내륙 끝까지 밀렸다. 이후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지만 광복절 안에 부산을 점령하고자 했던 북한의 공세에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인민군 3사단, 13사단, 1사단 1개 연대가 백선엽 준장이 이끄는 국군 1사단을 향해 공격해왔다. 


전투는 보름이 넘게 이어졌다. 기나긴 전투 끝에 국군 11연대 1대대가 후퇴했고 미군 27연대도 철수하겠다고 통보해왔다. 


이때 백 준장은 권총을 들고 병사들 앞에 섰다. 


"지금까지 정말 잘 싸웠다. 그러나 여기서 밀린다면 대한민국은 끝이다. 내가 앞장서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쏴라. 나를 믿고 앞으로 나가서 싸우자"


돌격 직전 부하들의 사기를 끌어 올린 백 준장은 스스로 선봉에 서서 488고지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사단장이 직접 전투 선봉에 나서는 것을 '사단장 돌격'이라고 하는데, 근현대 전쟁사에서 비슷한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다. 


3. 미군 전차대대를 지휘해 최초 평양 점령


인사이트1950년 10월 동평양에서 작전 지휘 중인 백선엽 준장 / Wikipedia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역전됐다. 북으로 반격이 시작됐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은 국군의 전투력을 의심했다. 이때 백 준장이 나섰다. 그는 직접 영어로 말하며 미군 장교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1사단의 전투력과 사기가 매우 높아 UN군의 선두에 서서 평양을 향해 제일 빨리 진격할 수 있다. 나는 평양에서 어릴 때부터 계속 살아와 길을 잘 안다"


이어 "단지 우리에게는 미군과 같은 화력이 없다. 만약 1사단에 미군 전차 1개 대대를 지원해 주면 선두에서 진격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한 미군 장교가 "보병뿐인 한국군이 미군보다 빨리 갈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자 백 준장은 "잠을 자지 않고 야간에도 행군해가며 이동속도를 늘리겠다"라며 굳은 의지를 보였다. 


결국 미군은 백 준장에게 1개 전차 대대를 배속시켰다. 미군의 역사상 비슷한 사례가 몇 없을 정도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실제 그의 부하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맹행군을 이어갔으며 결국 10월 19일 최초로 평양을 점령했다. 


4. 중공군의 춘계 공세 저지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북진 통일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중공군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1951년에 이르러서는 이른바 '춘계공세'가 이어졌다. 수십만의 중공군이 남으로 쏟아져 내려왔다. 


이 시기 소장으로 진급, 제1군단장을 역임하게 된 백선엽 소장은 강원 인제군 원통에서 인민군 제5군단의 공격을 저지하면서 대관령을 중공군보다 먼저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영동 지역의 관문을 틀어막은 것. 이후 좁은 산악지역에서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한 중공군은 보급 난과 증원 부족으로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이어 5월 미군 제3보병사단과 함께 운두령을 탈환하며 중공군의 공격을 완전히 막아내는 데 성공한다. 


백 소장의 활약으로 동부전선을 지킨 국군은 38도선 이북으로 올라가 화진포까지 확보할 수 있게 됐다. 


5. '백(白) 야전사령부'의 빨치산 토벌전


인사이트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모습 / 뉴스1


1951년 11월 백 소장은 남한 후방지역 토벌에 나선다. 토벌 부대의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따 '백 야전사령부'로 이름 지어졌다. 


그의 임무는 인천 상륙작전 이후 퇴각하지 못한 빨치산들이 대거 모여 있는 지리산 인근에서 이뤄졌다.


무엇보다 일제강점기 시기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독립군을 토벌했던 백 소장의 경력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백 소장은 토벌 작전으로 5,800여명의 빨치산을 사살했고 5,700여명이 항복하거나 포로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