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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은 고종황제가 '독살 의문' 남긴 채 사망한지 100년째 되는 날입니다"

대한제국의 독자 개혁을 열망하던 고종황제는 이날 새벽 1시 '식혜'를 마신 뒤 숨을 거뒀다.

인사이트아산서원


[인사이트] 김한솔 기자 = 지난 1919년 오늘(21일), 새벽 6시께 덕수궁 함녕전 곳곳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새벽 1시 한약·식혜·커피 등을 마시고 잠이 든 고종 황제가 발작을 일으킨 것. 평소 건강하던 고종 황제는 67세의 나이로 그렇게 눈을 감았다.


고종 황제의 죽음은 나라의 독립을 열망하는 백성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며 3.1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현대에서는 고종 황제가 경술국치 뒤에 일본의 황적에 편입되는 것을 스스로 받아들였고, 일본으로부터 이태왕(李太王)이라는 직책과 일왕이 주는 은사금까지 수령 한 점 등 국가 지도자로서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인사이트한국학중앙연구원


그러나 고종 황제는 그 누구보다 대한제국의 독자 개혁을 열망했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 황제는 나라 이름을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며 열강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이후 1889년 청-일-러 3국의 3파전 속에서도 국권을 보존하려 노력했다고 전해진다.


1905년 일본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우리의 외교권을 박탈하자 고종 황제는 을사늑약의 부당함과 일본의 침략을 전세계에 알리고자 1907년 헤이그에 우리나라 특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했고, 이 사건을 구실로 이완용과 일본제국에 의해 고종 황제는 강제로 퇴위됐다. 


꺼져가는 국운의 불씨를 살리려 몸부림쳤던 고종 황제는 '독살' 의문만 남긴채 사라지고 말았다.


인사이트한국근현대사사전


고종 황제의 시신을 목격한 명성황후의 사촌 동생 민영달이 중추원 함의 한진창에게 한 말을 듣고 적은 윤치영의 일기에는 이와 관련된 내용이 상세히 적혀있다.


일기에 따르면 고종 황제는 식혜를 마신 지 30분도 안 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또한 고종 황제의 시신이 심하게 부풀어올라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려면 찢어야 할 정도라 적혀있다.


그러면서 "고종 황제의 이가 모두 빠져 있고 혀가 닳아 없어졌음을 발견했다"며 "30센티미터나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고 전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지시로 친일파 대신들이 "고종황제폐하께서 즐겨 마셨던 식혜에 독약을 탔다"는 주장이 적혀 있는 일본 궁내성 관리 구라토미 일기의 사본이 2009년 일본 국회 헌정 자료실에서 발견되며 신빙성을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