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전 오늘은 유관순 열사가 옥중 고문으로 순국한 날입니다"

인사이트(좌) 유관순 열사, (우) 8·15 광복, 일본 패망 소식에 거리로 나온 시민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사이트] 황규정 기자 = 98년 전 오늘(28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겨우 18살 난 어린 소녀가 숨을 거뒀다.


얼굴은 모진 고문으로 퉁퉁 부어올랐고, 손톱부터 발톱까지 온몸에 성한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었다.


그의 이름 유관순이다.


1902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난 유관순 열사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심지가 굳었다.


어린 나이에도 민족의 앞날을 먼저 걱정했다. 모두가 배불리 살게 해달라 기도할 때 유관순 열사는 "한국의 잔다르크가 되게 해주세요"라고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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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유관순 열사는 1919년 고종이 일제로부터 독살당했다는 소문을 듣는다.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조선 반도에 일제가 들어와 행패를 부리고, 나라를 빼앗으려 한다는 '진실'이 그의 가슴을 울렸다.


분노로 들끓는 백성들 사이에서 유관순 열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같은 해 3월 1일, 그렇게 '만세 운동'이 펼쳐졌다.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 학생들과 손을 잡고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독립 운동이었다. 만세 시위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자 모든 학교에 임시 휴교령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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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교는 유관순 열사에게 오히려 좋은 기회였다. 그 길로 고향 천안으로 내려간 유관순 열사는 일제의 만행을 알리며 마을 사람들에게 만세 운동 참여를 독려했다.


음력으로 3월 1일이었던 1919년 4월 2일 유관순 열사의 주도로 수천명의 군중들이 아우내 장터로 모여 들었다.


유관순 열사는 선두에 서서 자신이 직접 만든 태극기를 나눠주며 목청껏 만세를 선창했다.


결국 유관순 열사는 일본 헌병의 칼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체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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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유관순 열사는 절개를 꺾지 않았다.


7년 형을 선고받은 유관순 열사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며 투옥 중에도 만세를 외친 것으로 알려졌다.


1920년 9월 28일, 선선한 가을 바람이 부는 이맘때쯤 유관순 열사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나이 겨우 18살이었다.


이화학당 교장 프라이와 월터 선생의 항의로 시신은 인도됐으나 이미 토막나고 난도질당한 상태였다.


견디기 힘든 고문 속에서도 안위보다 절개를 택한 유관순 열사의 애국심은 지금도 우리나라에 큰 울림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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