멤피스 변압기에서 창원 초고압차단기까지...미리 다져온 전력기기 생산 기반
창립 60년, 세계 전력망으로 넓어진 제조업의 무대...HVDC로 다음 성장 준비
인공지능(AI)의 답변은 몇 초면 돌아온다. 그 짧은 순간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 것들은 시간이 훨씬 오래 걸린다. 반도체를 만들고 데이터센터를 세워야 한다. 서버까지 전기를 보내는 일도 남는다. 공장과 송전망은 소프트웨어처럼 내려받을 수 없다.
효성이 오랫동안 해온 일이 여기에 있다. 전압을 바꾸는 변압기, 전력계통에 문제가 생겼을 때 고장 구간을 분리하는 차단기. 평소에는 눈에 잘 띄지 않던 설비들이 AI 산업의 확장과 함께 주목받고 있다.
오는 11월 3일 창립 60주년을 맞는 효성에 전력기기 사업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섬유와 소재로 익숙한 기업의 이름이 이제 미국 전력망과 AI 데이터센터로 이어지고 있다. 조현준 회장이 미국 생산거점을 확보하고 국내외 공장에 투자를 이어온 시간이 그 바탕에 놓여 있다.
AI 열풍보다 먼저, 멤피스에 공장을 뒀다
효성중공업이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의 초고압변압기 공장을 확보한 것은 생성형 AI가 일상으로 들어오기 전이었다. 미국 전력시장에서 사업을 키우려면 현지에서 직접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는 판단이 먼저였다.
출발부터 순탄하지는 않았다. 2020년 현지 생산을 시작할 무렵 코로나19가 번졌다. 해외 공장을 운영하고 생산을 안정시키는 일부터 만만치 않은 시기였다. 효성은 이후에도 멤피스에 투자를 이어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현지 생산기지의 쓰임은 커졌다. 전력망 투자에 AI 데이터센터 수요까지 더해졌다. 미국 안에서 초고압변압기를 만들 수 있는 공장은 효성중공업이 고객에게 제시할 수 있는 구체적인 경쟁력이 됐다.
멤피스 공장은 미국 내에서 765kV급 초고압변압기를 설계·생산할 수 있는 거점이다. 효성중공업은 지난해 이 공장에 1억5700만달러를 투자해 2028년까지 생산능력을 50% 이상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공장 인수부터 진행 중인 증설까지 투자 규모는 총 3억달러가량이다.
올해 2월에는 미국 송전망 운영사와 약 7870억원 규모의 765kV 초고압변압기·리액터 등 공급계약을 맺었다. 지난 9월에는 미국 빅테크 기업 두 곳으로부터 AI 데이터센터에 들어갈 초고압변압기 3865억원어치를 수주했다.
조 회장의 투자 판단은 이 지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오늘의 AI 수요를 일찌감치 모두 예견했다고 설명할 필요는 없다. 미국 전력시장의 가능성을 보고 생산 기반을 마련했으며, 어려운 시기를 지나 증설을 이어갔다. 수요가 커졌을 때 효성에는 고객과 사업을 논의할 공장이 있었다.
주문을 받는 힘, 만들어 보내는 힘
늘어나는 수요는 생산 현장에 또 다른 과제를 남긴다. 주문받은 설비를 만들어 고객이 필요한 시점에 공급해야 한다. 전력기기 호황을 실제 사업 성과로 이어가는 데 공장과 공정이 중요한 이유다.
효성중공업이 지난 16일 경남 창원에 준공한 수출 전용 초고압차단기 신공장도 그 연장선에 있다.
약 1만8996㎡ 규모의 신공장은 420kV·550kV·800kV 차단기를 전담 생산한다. 기존 공장은 내수 기종을 중심으로 재편하고, 신공장은 수출용 제품에 집중하는 방식이다. 이번 증설로 창원의 420kV 이상 초고압차단기 생산능력은 기존 대비 약 두 배로 늘었다.
제품을 조립할 공간만 넓힌 것도 아니다. 핵심 부품인 절연물 생산능력을 함께 약 두 배로 확대했다. 부품 생산부터 조립과 시험, 출하까지 한곳에서 수행하도록 공정도 갖췄다. 생산 효율과 납기 대응력을 함께 높이려는 투자다.
변압기와 차단기는 역할이 다르지만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위해 모두 필요한 설비다. 효성중공업은 두 분야의 생산 기반을 넓히며 전력망 투자가 만들어내는 수요에 대응하고 있다.
조 회장은 그동안 “비즈니스의 기회는 5년 앞을 내다보고 땀 흘려 준비한 기업에게만 찾아오는 만큼, 선제적인 공급망 투자로 시장의 판도를 바꾸고 글로벌 고객의 ‘AI 병목’을 해결하는 핵심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창원 신공장은 그 주문이 생산 현장으로 옮겨진 사례다. AI 산업의 성장 속도를 이야기하는 기업은 많다. 그 속도를 전력망이 따라갈 수 있도록 설비를 만드는 일에는 오랜 기술과 투자가 필요하다. 효성이 쌓아온 제조업의 시간이 힘을 발휘할 대목이다.
예순 살 효성, 익숙한 기술의 새로운 쓰임
효성중공업은 1978년 170kV 가스차단기를 개발하며 차단기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축적한 기술과 생산 경험이 오늘의 초고압차단기로 이어졌다. AI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해온 일이 첨단산업의 확장을 뒷받침하고 있는 셈이다.
60주년을 맞은 효성의 변화도 이 흐름에서 읽힌다. 새로운 산업이 열릴 때 기존 기술의 가치가 더 커질 수 있다. 전력기기가 그렇다. 전기를 안정적으로 보내고 제어하는 능력이 중요해질수록 오랫동안 현장을 지켜온 기업의 경험도 무게를 얻는다.
다음 투자도 진행 중이다. 효성중공업은 대규모 전력을 먼 거리까지 보내는 초고압직류송전(HVDC) 분야를 키우고 있다. 2017년 국책과제로 시작한 200MW급 전압형 HVDC 독자 기술 개발을 2024년 마쳤으며, 개발에는 약 1000억원을 투입했다.
앞으로는 2GW급 대용량 기술의 국산화·실증을 통해 사업 기반을 넓힐 계획이다. 확보한 기술을 더 큰 규모로 검증하고 실제 전력망에 적용하는 과정이 남아 있다.
창원에서는 HVDC 변압기 전용 생산시설도 짓고 있다. 2027년 7월 완공을 목표로 하는 이 공장은 본격 가동하는 2028년부터 창원공장 전체 변압기 생산능력을 약 20% 늘릴 것으로 회사는 기대하고 있다.
멤피스에서 확보한 생산 기반은 미국 사업의 발판이 됐고, 창원에서는 늘어난 수요에 대응할 설비와 다음 시장을 준비할 공장이 함께 들어서고 있다. 조 회장의 투자에 관심이 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 번의 인수에 머물지 않고 생산능력과 기술을 보태며 사업을 키워왔다는 점이다.
AI의 변화는 빠르다. 그 변화를 떠받치는 전력설비는 오랜 준비 끝에 현장에 들어간다. 예순 살 효성은 그 시간의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다음 성장을 위한 준비도 공장에서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