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스테인리스 냄비나 프라이팬은 포장을 뜯자마자 바로 불에 올려서는 안 된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매끈하고 반짝이는 표면과 달리 제품 곳곳에는 맨눈에 잘 띄지 않는 미세 입자가 그대로 남아 있고, 이를 모른 채 찌개나 국을 끓이면 그 입자가 음식과 함께 그대로 식탁에 오른다는 지적이다.
정체는 스테인리스 제조 공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흠집을 없애고 광택을 내기 위해 쓰이는 연마제다. 세척 없이 바로 조리에 쓸 경우 찌개나 국물 요리에 이 성분이 섞여 들어갈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정체는 탄화규소
연마제는 금속 표면의 흠집을 지우고 광택을 내기 위해 사용된다. 전문가들은 이 과정에서 남는 검은 가루 성분을 탄화규소(실리콘 카바이드)로 지목한다.
상명대 화학에너지공학과 강상욱 교수는 한 방송 인터뷰에서 냄비 표면에서 닦여 나오는 검은 물질에 대해 "이 검은 물질은 탄화규소로 확인이 됐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국제암연구소(IARC)는 탄화규소를 발암성 측면에서 2A등급, 즉 '인체 발암 추정 물질'로 분류하고 있다. 이는 동물실험에서는 발암 가능성이 확인됐지만 인체 대상 실험 근거는 아직 제한적인 물질에 부여되는 등급으로, 붉은 고기나 65도 이상 뜨거운 음료 등이 같은 등급에 속한다. 등급 자체가 즉각적인 중독이나 급성 질환을 뜻하지는 않지만, 섭취나 노출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편이 바람직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문제는 이 성분이 일반적인 설거지로는 제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탄화규소는 소수성, 즉 물과 잘 섞이지 않는 성질을 지니고 있어 퐁퐁 같은 주방세제와 물로 아무리 문질러도 표면에 박힌 입자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강 교수는 이어 "탄화규소는 물 하고는 친하지 않은 소수성 물질"이라고 설명했다. 게다가 매우 미세한 분말 형태로 존재해 스테인리스 표면의 미세한 홈 사이사이에 강하게 결합돼 있어, 세제 세척만 거친 냄비로 산성 성분이 많은 김치찌개나 토마토소스 요리를 끓이면 미량이 용출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냄비뿐 아니라 텀블러와 수저, 프라이팬 손잡이 등 일상에서 자주 쓰는 스테인리스 제품 전반이 같은 제조 공정을 거치는 만큼 동일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뒤따른다.
4단계 세척법
세척의 첫 단계는 식용유나 카놀라유를 키친타월에 듬뿍 묻혀 냄비와 프라이팬 표면을 힘주어 닦아내는 것이다.
탄화규소는 지용성 물질과는 잘 결합하는 반면 물과는 섞이지 않는 성질을 지녀, 기름으로 문지르면 시커먼 가루가 타월에 묻어 나온다.
바닥뿐 아니라 굴곡진 모서리, 뚜껑 이음새, 손잡이 연결 부위처럼 연마제가 많이 남아 있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닦아내는 것이 핵심이다.
검은 가루가 더 이상 묻어나지 않을 때까지 반복한 뒤에는 베이킹소다를 뿌려 약알칼리성 성분으로 남은 기름기와 미세 입자를 흡착시키고, 물에 적신 수세미로 한 번 더 닦아 헹군다.
마지막으로 식초를 희석한 물을 끓여 소독하는 과정을 거치면 사용 준비가 끝난다. 뜨거운 물을 끓였을 때 표면에 무지개빛 얼룩이 보이지 않으면 연마제가 충분히 제거됐다는 신호로 통한다.
최근에는 번거로운 식용유 세척 단계를 생략하는 대안도 주목받고 있다. 식용유로 20~30분씩 문지르는 기존 방식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기름기가 남기 쉬워 비효율적이라는 지적에 따라, 베이킹소다와 주방세제만으로 3~5분 안에 연마제를 제거하는 방법이 최근 소개됐다.
뜨거운 물에 베이킹소다를 풀어 냄비를 담갔다가 세제로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계면활성제와 약알칼리 성분이 연마제 입자를 분해해 짧은 시간 안에 닦아낸다는 설명이다.
다만 이 간소화된 방식은 스테아린산이나 산화알루미늄을 쓰는 국내산 제품에 더 적합하고, 탄화규소가 쓰인 수입산 제품은 지용성 특성상 식용유 세척을 거치는 편이 안전하다는 게 중론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도 첫 세척 이후 식초물을 희석해 10분가량 끓이는 소독 과정을 추가로 권고하고 있다.
비닐이나 스티커가 붙어 있는 제품이라면 접착 성분이 남지 않도록 이 역시 세척 전 깨끗이 떼어내야 한다. 신제품을 사용하기 전 단 몇 분의 세척 과정을 거치는 것만으로 불필요한 물질 섭취를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구매 직후의 첫 손질이 장기적인 주방 위생을 좌우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