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예능 프로그램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가 1983년 대한민국을 뒤흔든 '이웅평 대위 미그기 귀순 사건'의 숨겨진 이야기를 조명했다.
지난 3일 방송된 '꼬꼬무' 239회는 '기수를 자유로 돌려라!-북에서 온 이웅평' 편을 통해 북한 공군 대위 출신 이웅평의 극적인 귀순과 그 이후의 삶을 다뤘다. 이날 방송에는 그룹 온앤오프 효진, 가수 청하, 배우 윤유선이 출연해 이웅평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함께 들여다봤다.
북한 공군 초엘리트 군인이었던 이웅평의 인생은 휴가지 바닷가에서 우연히 발견한 라면 봉지 하나로 전환점을 맞았다.
라면 봉지 뒷면에 적힌 '유통 과정에서 변질된 제품은 즉시 교환해 드립니다'라는 문구는 그에게 남한 사회의 소비자 권리 보장 시스템을 각인시켰다. 이는 북한 체제에 대한 그의 상식에 큰 균열을 만들었다. 이후 친척 문제로 아버지가 숙청당하는 사건을 겪으며 체제의 모순을 깨달은 그는 목숨을 건 탈출을 결심했다.
1983년 2월, 29세의 이웅평은 비행 훈련 중 편대를 이탈하며 레이더망을 피하는 초저공비행을 시도했다.
수도권 전체에 대공 경계경보가 발령됐고, 서울 상공은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대한민국 공군 전투기들이 그를 포위한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이웅평은 항복 신호를 보내며 수원 비행장에 무사히 착륙했다. 이 장면을 들은 청하는 "소름 돋는다"라며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북한의 비밀을 폭로하러 왔다"라고 밝힌 이웅평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파격적인 대우를 제공했다.
구소련 최첨단 전투기 미그기 확보와 북한 군사 기밀 제공의 대가로 15억 6천만 원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이는 당시 고급 아파트 78채를 구입할 수 있는 거액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를 공군 소령으로 정식 임관시켰다.
이웅평은 이후 '반공 아이돌'로 떠올랐다. 한 해 900회 이상의 안보 강연을 소화하며 150만 명의 인파를 운집시켰다. 방탄소년단 급의 인기를 누렸지만, 화려한 겉모습 뒤에는 감시와 공포, 북한에 남겨둔 가족에 대한 죄책감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암살 위협과 독극물 테러에 대한 두려움은 일상이었고, 국가 기관의 감시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이웅평은 과외 교수의 딸 박선영 씨와 첫눈에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박선영 씨는 신혼집에 설치된 도청 장치를 직접 뜯어내고 보안 사령관을 찾아가 항의하는 강단을 보였다. 아내의 노력 덕분에 이웅평은 비로소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웅평은 풍요로운 삶에 만족하지 않고 탈북민 지원 활동에 앞장섰다. 1987년 함경북도 청진 의과대학 의사 김만철 씨 일가 11명이 일본 해역에서 표류한 끝에 대만으로 이송됐을 때, 그는 정부의 비밀 특사로 대만에 급파됐다.
이웅평은 김만철 씨를 설득해 대한민국 귀순을 성사시켰다. 귀순 군인들과 간첩까지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일상을 공개하며 전향을 도왔다. 윤유선은 "굉장히 용감하다"라며 감탄을 표했다.
이웅평은 북한 동포들과 군인들의 자유를 바라는 마음으로 계절마다 가족사진을 찍어 대북 전단에 실어 보냈다. 자신의 행복한 삶을 북한에 알리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1997년 이웅평은 간경화로 시한부 판정을 받으며 다시 한번 죽음의 문턱에 섰다. 아내 박선영 씨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고, 의료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국내 최초 수준의 간이식 수술 기회를 얻어냈다. 수술을 앞두고 이웅평은 "통일을 못 봤다"라며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이후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 있던 누나를 비롯한 가족들의 비극적 소식이 전해졌다.
이웅평은 심각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귀순 당시 받은 15억 원의 보상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통일 후 북한 가족들을 위해 남겨둘 정도로 고향 가족을 향한 그의 마음은 깊었다.
결국 이웅평은 병원으로 이송된 후 2002년 향년 4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윤유선은 "너무 허망한 죽음"이라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방송 마지막에는 이웅평의 아내 박선영 씨가 "그가 사회에 조금이라도 도움과 울림을 주는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라는 소회를 전하며 시청자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