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5년 10월 개봉한 일본 영화 '8번 출구'가 국내에서 44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으며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일본 공포 영화로는 이례적인 성적이다. 이 영화에는 귀신도 나오지 않고, 괴물도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지하 통로를 걷는 주인공 앞에 포스터 속 인물의 눈이 움직이거나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이상 현상'이 나타날 뿐이다.
영화의 생존 조건은 명확하다. 이상 현상을 발견하면 즉시 되돌아가고, 없으면 앞으로 나아가 8번 출구로 빠져나가면 된다.
규칙을 어겨도 죽지는 않지만 같은 공간을 끝없이 반복해서 걷게 된다. 관객들은 "처음엔 별로 무섭지 않았는데 반복되는 공간에서 오는 공포가 독특했다", "일상적인 지하철 공간이 스릴러 무대로 바뀐 점이 인상적이다"라는 반응을 쏟아냈다.
이처럼 최근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온라인과 게임, 영화, 웹소설을 오가며 인기를 얻고 있는 장르가 있다. 바로 '규칙 괴담'이다.
대놓고 무서운 장면 없이도 '뒤를 돌아보지 마라', '이상한 사람을 발견하면 되돌아가라'처럼 규칙만 나열한다. 정작 규칙을 어기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규칙 괴담과 자주 언급되는 또 다른 장르가 '나폴리탄 괴담'이다. 2004년경 일본 인터넷에 등장한 것으로 추정되는 '공포의 나폴리탄'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숲에서 길을 잃은 주인공이 어느 식당에서 나폴리탄 스파게티를 먹고 나오는 짧은 이야기인데, 무서운 장면은 거의 없다.
다만 주인공이 먹은 음식이 '먹어서는 안 될 무언가'였을 가능성만 남겨둔다. 무엇을 먹었는지, 왜 위험한지는 끝까지 설명하지 않는다.
독자가 빈칸을 상상하며 공포를 느끼는 구조다. 이 이야기는 2009년경 국내 인터넷에도 유입됐다.
국문학 연구자 박광은은 논문 '나폴리탄 괴담 장르의 형성과 그 성격'(2024)에서 미국 규칙형 괴담이 2010년대 중반 국내에 들어왔고, 2019년경 나폴리탄 괴담과 결합했다고 분석했다. 서로 다른 뿌리를 가진 인터넷 괴담이 만나 지금의 규칙 괴담 문법을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전설의 고향' 스타일 공포에는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다. '장화홍련전'처럼 억울하게 죽은 사람과 가해자가 있고, 귀신은 억울한 사연을 알리거나 복수하려고 나타난다.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고 원한이 풀리면 이야기가 끝난다.
규칙 괴담은 정반대다. 이유 설명 없이 지시부터 한다. '뒤를 돌아보지 마라', '12시까지 야근하다 종이 울리면 바로 엎드려라' 같은 식이다.
안내문처럼 보이지만 핵심 내용은 빠져 있다. 왜 그래야 하는지, 규칙을 어기면 무엇이 나타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대신 규칙을 찾아내고 따르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남겨둔다. 공포영화보다 게임에 가까운 느낌이 드는 이유다. 관객이나 독자는 이야기를 지켜보는 대신 '나라면 어떤 규칙을 선택할까'를 생각하게 된다.
노란 벽지와 형광등 아래 비슷한 공간이 끝없이 이어지는 '백룸(Backrooms)'이나 지하철 통로에서 이상 현상을 찾아내야 하는 '8번 출구' 역시 이런 감각을 공유한다. 익숙해야 할 공간이 조금씩 어긋날 때 생기는 불안, 이른바 '리미널 스페이스'의 공포를 활용한다.
국내 웹소설과 웹툰에서도 인터넷 괴담 속 세계에 사람이 들어가거나 초현실적 사건을 해결하는 조직을 그린 작품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즐기던 괴담 문법이 게임과 영화, 웹소설·웹툰으로 영역을 넓히는 중이다.
'백룸'이 글로벌 흥행을 기록하자 할리우드 대형 스튜디오들도 '괴담 IP' 확보전에 뛰어들었다. 지난 2025년 7월 북미 연예매체 데드라인에 따르면 11개 스튜디오가 경쟁 끝에 스티븐 스필버그의 제작사 앰블린 엔터테인먼트와 아마존 MGM 스튜디오가 유튜브 호러 시리즈 '만델라 카탈로그'의 영화 판권을 확보했다.
워너브라더스 픽처스도 경쟁 끝에 도시전설을 바탕으로 한 유튜브 단편 '사이렌 헤드'의 영화화 권리를 따냈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유튜브에서 성장한 괴담이 대형 스튜디오가 탐내는 원천 IP로 자리 잡은 셈이다.
유튜브에서도 규칙 괴담은 인기 소재다. '버러지', '종이필름' 등 괴담 콘텐츠 창작자들은 규칙 괴담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공포 세계관을 만들고 가상 상황을 영상으로 선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영상 이후에 펼쳐진다. 댓글에는 "15번 규칙은 사실 함정 같다", "이 행동을 하면 탈출할 수 있지 않을까" 같은 시청자들의 추론이 이어진다. 제작자가 설명하지 않은 부분을 시청자가 채우면서 이야기가 영상 밖에서도 계속된다.
규칙 괴담의 공포는 바로 이 '빈칸'에서 나온다. 무엇이 나타나는지 보여주는 대신 하지 말아야 할 행동만 알려주고, 이유는 감춘다. 정답이 없으니 사람들은 댓글에서 서로의 해석을 비교하고 또 다른 가능성을 찾아낸다.
콘텐츠를 혼자 감상하고 끝내기보다 댓글로 감상을 나누고 세계관을 확장하는 데 익숙한 세대에게는 이런 불친절함마저 놀거리가 된다. 사건이 왜 벌어졌는지 설명하지 않는 것이 이야기의 구멍이 아니라 각자 추리하고 이야기를 덧붙일 자리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