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양동 아파트 화재로 뇌병변 장애 모자가 숨지면서 정부의 장애인 화재 대응 매뉴얼이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계단 이용 대피 요구 등 실행 불가능한 지침과 스프링클러 미설치 등이 문제로 지적됐다.
16일 행정안전부와 국립재난안전연구원이 만든 '지체·뇌병변장애인 화재 재난대응 안전교육자료'를 들여다보니 현장 적용이 어려운 내용들로 채워져 있었다.
매뉴얼은 화재 발생 시 "엘리베이터는 절대 사용하지 않고 계단을 이용해 신속하게 대피한다"고 명시했다. 하지만 휠체어에 의존하거나 거동이 불편한 지체·뇌병변장애인에게 계단 이용은 거의 불가능한 요구다.
스스로 대피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구체적 대책도 찾아볼 수 없다.
매뉴얼은 "본인의 상황을 주변에 알리고 도움을 요청해 대피하라"거나 "휠체어 및 보조기구로 수직 이동이 어려운 장애인은 지원자의 도움을 받아 대피하라"는 추상적 안내만 담고 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이수미 활동가는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휠체어를 타고 혼자 계단을 오르내릴 수도 없고, 문조차 열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며 "매뉴얼의 내용은 말이 안 된다"고 꼬집었다.
활동지원자가 동행한 경우를 전제로 한 대피 방법도 현실성이 떨어진다.
매뉴얼은 장애인을 '안거나 업거나 끌어서' 대피하도록 안내한다. 이 활동가는 "3층 아래 저층이라면 어떻게든 끌고 내려올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번 사고처럼 고층이라면 성인 한 명을 안고 계단을 내려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가양동 화재 현장에서 만난 한 장애인 주민은 "나도 휠체어를 타기 때문에 잘 안다"며 "불이 나 엘리베이터가 막히면 우리는 그냥 죽을 수밖에 없다"고 절박한 심정을 토로했다.
장애인 단체들은 자력 대피가 어려운 장애인에게 '빨리 대피하라'는 요구만 되풀이할 게 아니라 화재 확산 속도를 늦출 수 있는 시설 확충이 우선이라고 강조한다.
스프링클러 등 초기 소화 설비 설치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번 화재가 발생한 가양동 아파트에는 스프링클러가 설치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장애 유형별 맞춤형 경보·대피 장치 부족 문제도 심각하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이승헌 사무국장은 "청각장애인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경보기가 필요한데, 이 또한 직접 신청해야 해 놓치는 사람들이 많다"며 "장애인 가정을 선제적으로 방문해 필요한 안전장치를 설치하고, 실제 화재가 났을 때 어떻게 대피할지 설명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혼자 생활하는 장애인은 화재 위험에 더욱 노출돼 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전체 장애인의 26.6%가 1인 가구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장애 유형은 물론 거주 층수와 활동지원자 유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맞춤형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