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 조선소에 투자한 외국 조선업체에 한해 미 해군 함정의 초기 물량을 본국에서 건조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해외에서 먼저 선박을 만든 뒤 후속 물량을 미국으로 옮겨 생산하는 이른바 '핀란드 모델'을 군함 건조까지 확대하는 방식이다.
미국 필라델피아 필리조선소를 보유한 한화는 국내 조선사 가운데 이번 조치를 가장 직접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업체로 꼽힌다.
다만 한국 조선소가 당장 미 군함을 수주해 건조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실제 사업에 적용하려면 미국 정부의 별도 판단과 의회 통보 절차를 거쳐야 한다.
13일(현지시간) 백악관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해군 전력과 조선산업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각서에 서명하고 전쟁부에 핀란드 모델을 활용한 신규 함정 확보 방안을 마련하도록 지시했다.
대상은 미국에 조선소를 새로 짓거나 기존 조선소를 보유한 외국 조선업체, 또는 미국 조선소 지분을 절반 이상 확보한 업체다.
조건을 충족한 업체는 초기 물량 가운데 최대 두 척을 자국 조선소에서 건조할 수 있다. 이후 후속 물량은 미국 내 조선소에서 생산해야 한다.
미국이 해안경비대 중형 쇄빙선 사업에 적용했던 방식을 미 해군과 미국 조선산업 전반으로 확대하겠다는 구상이다.
적용 대상도 군수지원선에 그치지 않는다. 군함에 연료와 물자를 공급하는 지원선은 물론 전투 임무를 수행하는 수상전투함까지 포함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쟁부에 90일 안에 잠수함과 적 수상함을 공격하고 함대와 수송선을 보호할 수 있는 수상전투함 확보 방안을 마련하도록 했다. 해상에서 연료와 물자를 공급하는 유조선과 차량·장비를 실어나르는 롤온·롤오프(Ro-Ro) 수송선도 검토 대상에 올랐다.
그동안 미국은 자국 군함을 해외 조선소에서 건조하지 못하도록 원칙적으로 제한해왔다. 다만 국가안보상 필요성이 인정될 경우 예외를 허용할 수 있다.
이번 각서는 이 예외 조항을 실제 미 군함 조달 사업에 활용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미 해군이 외국 조선업체의 기존 선박 설계를 과도하게 변경하는 관행에도 제동을 걸었다. 검증된 설계를 수정하려면 전쟁부 고위 당국자의 승인을 받도록 해 잦은 설계 변경에 따른 비용 증가와 건조 지연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국내 조선업계에서는 한화가 이번 정책의 조건에 가장 가까운 업체로 거론된다.
한화시스템과 한화오션은 2024년 1억달러를 투자해 미국 필라델피아의 필리조선소를 인수했다. 미국 현지 조선소를 직접 보유하고 있는 만큼 트럼프 대통령이 제시한 요건에 부합할 가능성이 높다.
한화는 필리조선소를 미국 내 조선사업의 핵심 거점으로 키우고 있다.
지난해에는 필리조선소에 50억달러를 추가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도크와 안벽을 신설하고 생산설비를 확충해 장기적으로 연간 건조 능력을 최대 20척까지 끌어올린다는 구상이다.
LNG 운반선 등 상선 중심의 사업 구조에서 해군 함정용 블록과 군함 건조까지 영역을 넓히는 것이 목표다.
미 해군 관련 사업도 이미 확보했다. 한화디펜스USA와 한화 필리조선소는 지난 3월 미 해군 차세대 군수지원함(NGLS) 사업에서 바드마린US의 하청업체로 선정됐다. 지난달에는 미국 미사일방어청(MDA)의 미사일 계측선(MRIV)을 필리조선소에서 건조하는 사업에도 참여하게 됐다.
한화는 미국 해군과 해안경비대 함정을 건조하는 호주 조선업체 오스탈의 미국 사업 인수도 추진 중이다. 인수가 성사되면 미국 내 군함 건조 기반을 한층 넓힐 수 있다.
이번 조치는 한·미가 추진해온 조선 협력의 연장선으로도 해석된다. 지난해 한·미 정상회담 공동 팩트시트에는 미국 조선소 투자와 인력 양성, 유지·보수·정비(MRO), 공급망 협력을 확대하고 한국에서 미국 선박을 건조하는 방안을 추진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다만 이번 각서가 곧바로 '한국산 미 군함'의 현실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 한국 조선소에서 미 군함을 건조하려면 사업별로 전쟁부 장관이 국가안보상 해외 건조가 필요하다고 판단해야 한다. 이후 의회에 관련 내용을 통보하고 30일이 지나야 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
미 의회의 견제도 남아 있다. 의회에서는 전투함과 일부 군수지원함의 해외 건조를 제한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 조선업체가 미국 군함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문은 이전보다 넓어졌지만, 실제 수주까지는 정부 승인과 의회 절차라는 관문이 남아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미국 현지 조선소와 한국 내 대형 조선 생산기반을 동시에 활용할 수 있는 업체에는 새로운 기회가 열렸다. 특히 필리조선소를 이미 확보한 한화가 트럼프 행정부의 조선업 재건 전략에서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 국내 조선업계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