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개발 방식이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예전에는 시작차(Prototype)을 만들고, 달리고, 고치는 과정을 반복하며 완성도를 끌어올렸지만 이제는 차가 실제 도로에 오르기 전부터 더 많은 검증이 이뤄진다.
차량 안에 들어가는 소프트웨어와 전자장비가 늘어나면서, 개발 과정에서 확인해야 할 변수도 그만큼 많아졌기 때문이다.
변화의 중심에는 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 SDV(Software Defined Vehicle)가 있다.
자동차는 출고 시점의 완성도를 넘어,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통해 기능과 성능이 계속 달라지는 제품으로 진화하고 있다. 전동화와 자율주행, 커넥티드 기술이 고도화되면서 차량 구조도 한층 복잡해졌다.
차량 구조가 복잡해지면 주행 성능 하나를 평가할 때도 고려해야 할 요소가 늘어난다. 조향감과 승차감, 고속 안정성, 소음과 진동은 물론 전자제어 시스템과 소프트웨어가 어떤 방식으로 맞물리는지도 함께 봐야 한다. 고객이 기대하는 품질 기준 역시 과거보다 높아졌다.
현대차·기아는 기존의 실차 시험에 가상 검증 기술을 더해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고 있다. 실제 차를 만들기 전 가상 공간에서 성능을 먼저 확인하면 개발 초기 단계부터 문제를 줄이고, 차량 완성도를 끌어올릴 수 있다.
남양기술연구소에 구축된 드라이빙 시뮬레이터는 그 핵심 장비 중 하나다. 실제 도로와 차량의 움직임을 가상 환경에 구현해, 신차 개발 초기 단계부터 주행 성능과 부품 특성을 확인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겉모습은 대형 게임 장비를 떠올리게 하지만, 실제 역할은 차량 개발에 가깝다.
화면 속 도로를 달리는 동안 운전자가 느끼는 조향감, 차체 움직임, 노면 충격, 가속과 감속 때의 반응을 데이터로 확인하고 조정하는 연구 장비다.
운전석 앞에는 270도 화각의 대형 곡면 스크린이 펼쳐진다. 콕핏에는 실제 양산차에 들어가는 스티어링 휠과 시트, 페달, 내부 트림이 적용됐다.
차량의 움직임은 6자유도 모션 시스템이 구현한다. 전후·좌우·상하 움직임에 더해 롤, 피치, 요 회전 운동까지 함께 재현하는 방식이다.
가속할 때 차체가 뒤로 눕는 느낌, 급제동 때 앞으로 쏠리는 움직임, 코너를 돌 때 좌우로 전달되는 힘이 가상 환경 안에서 구현된다.
270도 곡면 스크린에는 4K 해상도와 240Hz 주사율을 지원하는 프로젝터 9개가 사용된다. 각 프로젝터가 30도씩 화면을 나눠 구현해 빠른 주행 상황에서도 화면이 부드럽고 선명하게 이어진다.
현대차그룹은 실제 도로와 같은 환경을 구현하기 위해 남양기술연구소 주행시험장을 1㎜ 단위로 정밀 스캔했다.
세계 최초로 지형 서버(Terrain Server) 방식을 적용해 방대한 도로 데이터를 불러오는 대신 주행 위치 주변의 데이터만 실시간으로 주고 받아 초고용량 데이터 랜더링 사용에도 지연 없이 자연스러운 주행을 구현했다.
드라이빙 시뮬레이터는 차량의 큰 움직임뿐 아니라 노면에서 올라오는 미세한 진동까지 구현한다. 최대 40Hz 수준의 진동을 재현해 실제 주행에서 느껴지는 노면 감각까지 확인할 수 있다.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가혹한 서킷으로 불리는 독일 뉘르부르크링을 질주하는 레이스카와 현대 N 개발은 물론, 제네시스 마그마 등 고성능차 개발에도 활용되고 있다.
정밀한 해석 모델링 데이터를 바탕으로 부품의 특성을 실시간으로 바꿔 다양한 세팅을 실험할 수 있고, 날씨의 제약 없이 노면 주행도 즉시 평가할 수 있다.
현대차·기아는 앞으로 더 많은 차량과 시스템 개발에 드라이빙 시뮬레이터를 활용할 계획이다. 해외 연구소와 데이터를 공유해 글로벌 공동 개발에도 활용 범위를 넓힌다.
현대자동차그룹 관계자는 "드라이빙 시뮬레이터는 단순히 하드웨어를 도입한 것이 아니라, 소프트웨어부터 평가기준까지 현대차·기아만의 독자적인 데이터와 기술이 집약된 가상 검증 플랫폼"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