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그룹, 남극에서 그린수소 그리드 구축한다
현대자동차그룹이 남극과학기지의 친환경 전력 체계 전환에 참여한다.
자동차 회사가 지구 끝 남극의 전력 인프라 구축에 참여한다는 점만 보면 다소 의외의 행보다. 하지만 현대차그룹이 최근 수년간 강조해온 수소 전략을 들여다보면 이번 프로젝트의 의미는 분명해진다.
현대차그룹이 바라보는 수소는 더 이상 ‘수소차’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수소를 만들고 저장한 뒤 다시 전기로 바꾸는 에너지 순환 체계, 나아가 산업과 전력망까지 아우르는 미래 에너지 플랫폼으로 확장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18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 호텔에서 해양수산부, 극지연구소와 ‘남극과학기지 그린수소 그리드 구축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협약식에는 현대차그룹 전략기획담당 성 김 사장, 황종우 해양수산부 장관, 신형철 극지연구소장 등이 참석했다.
이번 협약은 2028년 세종과학기지 설립 40주년을 앞두고 추진됐다. 디젤 발전에 의존해온 남극 극지 연구시설의 전력 체계를 친환경 에너지 중심으로 전환하기 위한 협력 사업이다.
현대차그룹은 남극과학기지에 수전해기, 수소 저장 장치, 연료전지 발전기 등 수소 관련 설비를 도입하는 방식으로 그린수소 그리드 구축에 협력한다.
남극 특성 맞춤형 수소 에너지 시스템
린수소 그리드는 재생에너지로 얻은 전력을 활용해 물을 전기분해하고, 이 과정에서 생산된 수소를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다시 전기로 바꾸는 에너지 시스템이다.
태양광 발전량이 많은 시기에는 남는 전기로 수소를 만들고, 발전이 제한되는 시기에는 저장된 수소를 연료전지 발전기에 투입해 전력을 생산하는 구조다.
남극은 이 같은 시스템의 필요성이 뚜렷한 공간이다. 남극과학기지는 외부 전력망과 연결돼 있지 않고, 기상과 물류 여건도 까다롭다.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위해 그동안 디젤 발전에 크게 의존해왔다. 실제 극지연구소가 운영하는 세종과학기지와 장보고과학기지의 디젤 발전 비중은 약 97%에 달한다.
태양광 발전도 일부 활용되고 있지만 남극의 특수한 환경에서는 제약이 크다. 백야와 극야로 계절별 일조량 차이가 크고, 악천후와 적설도 잦다.
친환경 전력원을 안정적으로 활용하려면 생산된 전기를 장기간 저장했다가 필요한 시점에 다시 꺼내 쓸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 현대차그룹이 제시한 남극형 수소 전력 시스템은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한다.
수소차 넘어 에너지 플랫폼으로 확장
이번 프로젝트가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히 남극에 친환경 설비를 도입한다는 데 있지 않다. 더 중요한 대목은 현대차그룹의 수소 전략이 어디까지 넓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현대차그룹은 수소를 차량용 연료로만 보지 않는다. 재생에너지의 변동성을 보완하는 저장 수단, 고립 지역의 전력 공급 장치, 산업 현장의 친환경 동력원으로 활용 범위를 넓히고 있다.
그동안 대중에게 현대차의 수소 기술은 수소전기차 넥쏘를 통해 주로 알려졌다. 그러나 현대차그룹의 최근 행보는 수소 전략의 중심이 승용차 한 분야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장거리 운송, 상용차, 버스, 선박, 건설장비, 분산형 발전, 에너지 저장 등 배터리 전기차만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영역에서 수소의 역할을 키우겠다는 구상이다.
남극 프로젝트도 같은 흐름 위에 있다. 이곳에서 현대차그룹이 공급하려는 것은 자동차가 아니라 수소 기반 전력 시스템이다. 수전해기로 수소를 만들고, 저장 장치로 보관하며, 연료전지 발전기로 전기를 생산한다.
수소차의 핵심 부품이었던 연료전지가 차량 밖으로 나와 발전 설비가 되는 셈이다. 자동차 회사의 기술이 도로 위 모빌리티를 넘어 에너지 인프라로 확장되는 장면이다.
현대차그룹은 수소 밸류체인 확대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현대차는 지난해 10월 울산공장 내 수소연료전지 신공장 기공식을 열었다.
이 공장은 2027년 준공을 목표로 하며 연 3만 기 규모의 연료전지 생산 능력을 갖출 예정이다. 국내 첫 PEM 수전해 생산 거점 역할도 맡는다.
연료전지는 수소로 전기를 만드는 장치이고, 수전해기는 물을 전기분해해 수소를 만드는 장치다.
두 기술을 함께 확보한다는 것은 수소를 쓰는 단계와 만드는 단계를 모두 아우르겠다는 의미다. 완성차 제조사를 넘어 수소 에너지 생태계 전반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는 전략이다.
울산 신공장과 수소 밸류체인 구축... 미래 에너지 시장을 겨냥한 장기 전략
울산 신공장이 과거 내연기관 변속기 공장이 있던 부지에 들어선다는 점도 상징적이다.
기존 자동차 산업의 핵심이었던 엔진과 변속기의 시대에서 전기차, 수소연료전지, 에너지 저장 기술 중심의 미래 산업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남극 프로젝트가 수소 기술의 활용처를 보여준다면, 울산 신공장은 이를 뒷받침할 생산 기반인 셈이다.
현대차그룹의 수소 전략은 '차를 파는 회사'에서 '에너지를 움직이는 회사'로 향하고 있다. 수소전기차는 그 출발점이었고, 연료전지 발전과 수전해, 저장 장치, 상용 모빌리티는 그다음 단계다.
남극과학기지는 이 전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실증 무대다. 전력망에서 떨어진 극한 환경에서도 수소를 통해 에너지를 만들고 저장하고 다시 사용하는 구조를 검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 회사가 남극의 발전 설비에 참여하는 이유는 결국 하나다. 현대차그룹이 수소를 더 이상 자동차 연료가 아니라 미래 에너지 시장을 움직일 핵심 기술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도로 위 자동차에서 출발한 현대차의 수소 기술은 이제 남극의 과학기지, 산업 현장, 장거리 운송, 분산형 전력망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현대차그룹이 수소를 놓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기차가 승용차 시장의 중심축이라면, 수소는 더 넓은 산업과 에너지 영역을 겨냥한 장기 전략의 축이다.
남극과학기지 그린수소 그리드는 그 방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현대차가 바라보는 미래 시장은 더 이상 도로 위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