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북중미 월드컵 열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축구 종가' 영국의 한 지방 의회가 공공장소에 국기를 내거는 행위를 전면 금지하기 위해 고등법원에 금지 명령을 신청하며 거센 정체성 논란이 불붙었다.
지난 17일 중도·진보 성향 자유민주당이 이끄는 옥스퍼드셔 카운티 의회는 도로 주변 가로등을 비롯한 공공 시설물에 영국 국기 '유니언 잭'과 잉글랜드 국기 '성 조지 십자가' 깃발을 다는 행위를 막기 위한 법적 절차에 착수했다.
법원이 이를 승인하면 해당 지역 도로 주변에 국기를 단 사람은 최대 징역 2년 또는 상한 없는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 의회 측은 월드컵 응원조차 막아서는 이례적인 법적 대처의 명분으로 '도로 안전'과 '주민 보호'를 꼽았다.
의회 대변인은 "옥스퍼드셔 전역의 주민들이 이 활동과 관련해 고통을 호소해 왔다"며 "과도하게 국기를 내거는 움직임이 안전을 위협하고 지역사회에 고통을 초래했으며, 공공장소의 국기를 철거하려는 의회 직원과 주민을 향한 욕설과 위협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사유지에 국기를 다는 행위는 운전자의 시야를 방해하지 않는 한 제재 대상에서 제외된다.
이번 법정 공방은 지난해 여름 소셜미디어에서 시작된 '깃발을 올려라(Raise the Colours)' 캠페인이 월드컵을 기점으로 다시 번지면서 촉발됐다.
유니언 잭과 성 조지 십자가를 전국 가로등, 교량, 원형 교차로 등에 걸자는 이 운동은 국가적 자부심을 되찾자는 취지에서 시작됐으나 일부 이민자 밀집 거주지나 난민 수용 시설 주변에 깃발이 집중적으로 내걸리며 반이민 정서를 표출하는 배타적 행위로 변질됐다는 비판을 받았다.
우파 진영은 즉각 "애국심 탄압"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보수당과 영국개혁당 등은 잉글랜드 대표팀이 출전한 월드컵 기간에 국기 문제를 법정으로 끌고 간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입장이다.
의회 측은 "문제는 국기 자체가 아니라 도로 시설물에 대한 무단 부착과 그 과정에서 발생한 위협 행위"라고 반박했다.
영국 사회에 내재된 브렉시트 이후의 극심한 정체성 갈등이 투영됐다는 해석도 나온다. 월드컵 응원의 대중적 상징인 성 조지 십자가가 반이민 세력의 표식으로 쓰여 온 역사 탓에 소수 인종과 이민자 공동체에는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어서다.
가디언은 "성 조지 십자가가 우파 민족주의자와 축구 팬 사이의 줄다리기에 휘말렸다"며 "이 같은 운동을 '풀뿌리 운동'으로 해석해야 할지, 아니면 조직적 극우 세력의 도발로 볼 것인지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했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