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 간의 전면전 발발 이후 이란의 사실상 봉쇄 조치로 인해 호르무즈 해협 내에 고립되어 있던 한국 관련 선박 26척 중 한 척이 마침내 탈출에 성공했다.
지난 20일 외교부에 따르면 한국 최대 해운사인 HMM 소속의 초대형 유조선(VLCC) '유니버설 위너호'가 호르무즈 해협을 무사히 통과해 안전지대인 오만만에 진입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지난 2월 말 양국 간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 81일 만에 거둔 첫 외교적 성과이자, 전 세계 해상 물류망이 마비된 상황에서 한국 선박이 해협을 빠져나온 최초의 사례다.
200만 배럴의 쿠웨이트산 원유를 적재한 유니버설 위너호는 향후 국내 에너지 공급의 숨통을 틔우기 위해 울산항으로 입항할 예정이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이날 오후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이 같은 긴박한 상황을 공식 보고했다. 조 장관은 "지금 이 순간 우리 유조선이 이란 측과의 긴밀한 협의를 바탕으로 호르무즈 해협을 빠져나오고 있다"며 "이란 당국과 행정적·외교적 조율을 마쳤고, 이에 따라 어제 새벽부터 운항을 재개해 현재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항행을 지속하고 있다"고 밝혔다.
블룸버그 통신과 글로벌 선박 위치 추적 정보 사이트 '마린트래픽' 역시 유니버설 위너호가 카타르 인근 해역에서 출발해 20일 오전 이란 라라크섬 남쪽의 지정 항로에 진입했으며, 정상적인 운항 신호를 송출하며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했다고 긴급 보도했다.
외교부의 상세 발표에 따르면, 이란 정부는 지난 18일 밤 주이란 한국 대사관을 통해 "유니버설 위너호에 한해 호르무즈 해협 통항을 허용하겠다"는 취지의 공식 입장을 우리 정부에 전달해 왔다. 이에 선사 측과 정부는 내부 긴급 협의를 거쳐 19일 새벽부터 본격적인 기동을 시작했으며, 이란 측이 제시한 특정 안전 통항로를 따라 항해한 끝에 20일 해협을 완전히 탈출했다.
해당 선박에는 약 10명의 한국인 선원이 탑승하고 있어 정부가 선원 신변 안전을 최우선으로 두고 협상을 진행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통항 과정에서 가장 주목받은 부분은 한국 정부가 이란 측에 '통행료'나 기타 경제적 대가를 전혀 지불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선박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이란을 포함한 유관국과 다각적인 조율을 거쳤을 뿐, 금전적 지불이나 대가성 거래는 일절 없었다"고 못 박았다.
아울러 정부는 이번 통항이 지난 4일 발생한 HMM 소속 '나무호' 피격 사건에 대한 이란 측의 유화책이나 보상성 조치가 아니라는 공식 입장을 견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 정세 전문가들은 이란이 나무호 피격 사건을 의식해 통행에 동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하고 있다. 배후로 지목된 이란이 공식적으로는 피격 관련성을 부인하고 있지만, 한국 정부의 강한 외교적 압박과 국제사회의 거센 비난 여론에 부담을 느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실제로 조 장관이 세예드 압바스 아락치 이란 외교장관과 통화해 나무호 피격에 대한 진상 규명과 이란 측의 명확한 입장을 요구한 바로 다음 날 통항 허용 통보가 날아왔다는 점이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한다. 앞서 지난 3월에도 일본 상선미쓰이 소속 컨테이너선이 피격된 이후, 일본 관련 선박 3척이 이란의 묵인 하에 해협을 통과한 선례가 있다.
정부는 이번 첫 통항 성공을 발판 삼아 호르무즈 해협 내에 남아 있는 25척의 한국 관련 선박과 선원들을 구출하기 위해 이란 당국과의 협상을 지속한다는 방침이다.
외교부는 그간 전쟁 발발 이후 네 차례의 한-이란 외교장관 통화와 이주일간의 외교장관 특사 파견, 현지 공관 등 모든 외교 채널을 총동원해 왔다. 향후 협상에서도 한국인 선원의 다수 탑승 여부와 국내 산업에 직결된 핵심 화물 적재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우선 교섭 대상 선박을 선정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