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자동차 시장의 관심은 엔진 출력과 토크, 변속기의 응답성, 차체 강성에 집중됐다. 그러나 전기차와 커넥티드카, 자율주행 기술이 맞물리면서 자동차는 더 이상 기계적 완성도만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이제 소비자는 차량이 얼마나 똑똑하게 연결되고, 얼마나 빠르게 업데이트되며, 시간이 지나도 얼마나 새로워질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과거부터 "IT 업체보다 더 IT 업체 같아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취지의 메시지를 강조해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대차그룹에게 소프트웨어는 더 이상 차량 내부 기능을 보조하는 부품 기술이 아니다.
주행 성능과 사용자 경험, 데이터 서비스, 수익 모델을 동시에 움직이는 핵심 인프라다. 말하자면 미래차 시대의 소프트웨어는 자동차를 계속 뛰게 하는 '제2의 심장'이 되고 있다.
엔진의 시대에서 코드의 시대로
현대차그룹이 체질 전환에 속도를 내는 배경에는 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 즉 SDV 전환이 있다. SDV는 차량의 기능과 성능, 서비스가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에 의해 정의되고 확장되는 자동차를 뜻한다.
과거 자동차는 출고 시점의 상품성이 사실상 차량의 수명을 결정했다.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거나 성능을 개선하려면 하드웨어 변경이 필요한 경우가 많았다.
반면 SDV 체제에서는 자동차가 하나의 고성능 컴퓨팅 플랫폼처럼 작동한다.
스마트폰이 운영체제 업데이트를 통해 새 기능을 얻듯, 자동차도 무선 업데이트를 통해 주행 성능 개선, 첨단 운전자 보조 시스템 고도화, 인포테인먼트 기능 추가, 오류 수정 등을 이어갈 수 있다.
이 변화는 완성차 산업의 경쟁 공식을 바꾼다.
전기차 시대에는 내연기관처럼 브랜드별 파워트레인 차별화가 쉽게 드러나기 어렵다. 결국 소비자가 매일 체감하는 차이는 소프트웨어 완성도, 데이터 활용 능력, 차량 안팎을 잇는 사용자 경험에서 만들어질 가능성이 크다.
자동차가 '한 번 팔고 끝나는 제품'에서 '계속 진화하는 플랫폼'으로 바뀌고 있는 셈이다.
플레오스 커넥트, 현대차 전환의 시험대
현대차그룹이 공개한 차세대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플레오스 커넥트(Pleos Connect)'는 이 같은 전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플레오스 커넥트는 단순히 화면을 키우고 조작 방식을 바꾼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이 아니다. 현대차그룹이 차량을 하나의 디지털 플랫폼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를 구체화한 결과물에 가깝다.
플레오스 커넥트는 대화면·슬림 디스플레이, AI 기반 음성 어시스턴트 '글레오 AI(Gleo AI)', 개방형 앱 마켓 등을 앞세워 차량 안의 디지털 경험을 넓히는 데 초점을 맞췄다.
운전자는 복잡한 메뉴 조작 없이 음성 명령으로 차량 기능과 정보를 이용할 수 있고, 차량 내 콘텐츠와 서비스도 이전보다 폭넓게 확장될 수 있다.
주목할 부분은 앱 생태계다. 플레오스 커넥트 SDK는 구글 안드로이드 오토모티브 OS(AAOS)를 기반으로 차량용 앱 개발을 지원한다.
현대차그룹은 이를 통해 외부 개발자가 차량용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고 배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아직 완성된 차량용 앱 생태계가 열렸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자동차 안으로 앱과 콘텐츠, 서비스를 끌어들이는 플랫폼 경쟁의 출발선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플랫폼 주도권을 둘러싼 생존 경쟁
현대차가 IT기업화를 서두르는 이유는 분명하다. 차량이 도로 위를 달리는 스마트 디바이스가 되면 완성차 업체는 차량 판매 이후에도 고객과 계속 연결될 수 있다.
주행 데이터, 충전 패턴, 정비 이력, 인포테인먼트 이용 방식은 보험, 정비, 충전, 콘텐츠, 구독 서비스 등 새로운 사업 기회로 이어질 수 있다.
반대로 소프트웨어 주도권을 외부 플랫폼에 내줄 경우 완성차 업체는 하드웨어 공급자에 머물 위험이 있다.
차량 안의 운영체제와 데이터 접점, 앱 생태계가 빅테크 중심으로 재편되면 고객 관계와 서비스 수익의 상당 부분도 외부로 넘어갈 수 있다. 현대차그룹이 자체 소프트웨어 역량과 플랫폼 구축에 공을 들이는 이유다.
물론 과제는 만만치 않다. 자동차 소프트웨어는 스마트폰 앱과 다르다. 오류가 단순한 불편을 넘어 안전 문제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품질 검증과 사이버 보안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외부 개발자가 참여할 만큼 충분한 시장성과 수익 구조를 만드는 일도 쉽지 않다. 앱 마켓을 여는 것과 실제 생태계를 키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럼에도 방향은 분명하다.
미래 자동차의 가치는 엔진과 차체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차량을 얼마나 안전하게 업데이트하고, 얼마나 유용한 디지털 경험으로 확장하며, 고객과의 접점을 얼마나 오래 유지하느냐가 새로운 경쟁력이 되고 있다.
자동차 산업의 권력이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이동하는 과정에 있다. 현대차의 IT 기업화는 주도권을 지키기 위한 생존 전략인 셈이다.
현대차의 IT기업화는 아직 진행 중이다. 관건은 소프트웨어를 차량의 성능과 서비스, 고객 경험을 지속적으로 개선하는 실질적 경쟁력으로 만들 수 있느냐다.
이 전환이 안착한다면 현대차의 미래차 경쟁력도 하드웨어를 넘어 소프트웨어 역량으로 평가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