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5월 11일(월)

"1g에 수십만 원? 우리가 직접 만든다"... 수입 의존하던 '히알루론산' 국산화한 회장님

K-뷰티가 전 세계를 사로잡은 지금, '고보습'과 '기능성'은 K-스킨케어를 설명하는 대표 키워드가 됐다. 하지만 불과 40여 년 전만 해도 한국 화장품 산업은 일본·유럽 기술의 벽 앞에서 뒤쫓는 입장이었다. 그런 흐름을 바꾸겠다고 나선 기업이 있었다. 바로 현재의 아모레퍼시픽 전신인 태평양화학이다.


대한민국 화장품 산업이 아직 해외 기술을 따라가기에 급급하던 시절, 아모레퍼시픽은 전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창립 초기부터 원료 연구와 기술 개발에 공을 들이며, 해외 원료를 들여와 조합하는 수준을 넘어 자체 기술력을 확보하는 데 집중했다. 1954년에는 국내 최초로 화장품 연구실을 개설했으며, 이러한 연구개발 기조는 1984년 국내 최초 히알루론산 국산화로 이어졌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생성된 이미지


실제로 연구소에서는 국내 최초로 미생물 발효 방식을 통한 히알루론산 개발에 성공했고, 1966년에는 인삼을 원료로 한 'ABC 인삼크림'을 출시하며 국내 인삼 화장품 연구의 시작을 알렸다. 이 인삼 연구는 이후 오늘날 한방 화장품으로 자리매김한 설화수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콩 연구 또한 30여 년에 걸쳐 지속해온 분야로, 토종 콩 140여 종을 선별·연구해 화장품 원료로 적합한 계통을 발굴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중에서도 히알루론산 개발은 한국 화장품 산업의 흐름을 바꾼 상징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히알루론산은 자기 무게의 300~1000배에 달하는 수분을 끌어당기는 성질을 가진 대표적인 보습 성분이다. 피부 속 수분 유지와 탄력 개선, 피부 장벽 강화에 효과가 뛰어나 오늘날에는 화장품은 물론 인공눈물, 관절 주사, 필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 특히 원래 인체 피부와 관절, 눈 등에 존재하는 성분인 만큼 생체 적합성이 높아 의료·뷰티 산업 전반에서 핵심 소재로 자리 잡았다.


아모레퍼시픽


하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 상황은 달랐다. 히알루론산은 일본과 유럽 기업들이 기술을 독점한 고가 원료였고, 국내에서는 전량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당시에는 주로 닭 벼슬에서 성분을 추출했는데, 생산 과정이 복잡하고 수율도 낮아 1g당 수십만 원에 거래될 정도였다. 자연히 일부 최고급 화장품에 극소량 사용되는 수준에 그쳤다.


서성환 회장은 이 상황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원료 기술을 확보하지 못하면 수입 의존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고, 진정한 기술 경쟁력도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의 지시 아래 태평양화학(현 아모레퍼시픽) 연구진은 1980년대 초반부터 미생물 발효를 통한 히알루론산 자체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아모레퍼시픽 창업자, 장원(粧源) 서성환 선대회장 / 아모레퍼시픽


아모레퍼시픽 기술연구원은 안산 공장에 첨단 미생물 발효 설비를 구축하고 히알루론산 자체 생산 연구에 뛰어들었다. 연구진은 닭 벼슬 대신 특정 균주를 배양해 히알루론산을 얻어내는 미생물 발효 공법에 집중했다.


당시 연구원들은 발효 탱크의 온도와 배양 조건을 세밀하게 조정하며 최적의 배양 조건을 찾아냈다. 수입 원료의 불안정한 공급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절박함도 컸다. 그렇게 이어진 연구 끝에 아모레퍼시픽은 1984년 국내 최초로 미생물 배양 방식의 히알루론산 양산에 성공했다. 일본과 유럽 기업들에 이어 세계 네 번째로 이룬 성과였다. 동물성 원료 기반 공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바이러스 오염 위험을 줄였고, 균일한 품질의 대량 생산 체계까지 구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아모레퍼시픽


자체 생산 능력을 확보하면서 변화는 빠르게 나타났다. 원가 부담이 낮아지고 안정적인 공급이 가능해지자 히알루론산은 더 이상 일부 고가 제품에만 사용되는 원료가 아니게 됐다. 아모레퍼시픽은 개발한 원료를 초기 바이오 콘셉트 화장품인 '리바이탈 바이오' 제품군을 시작으로 마몽드와 라네즈 등 주요 브랜드에 확대 적용했다. 한국 소비자들이 본격적으로 '고보습 스킨케어'를 경험하기 시작한 배경에도 이러한 기술 혁신이 있었다.


이 연구는 이후 아이오페 등 바이오 기술 기반 스킨케어 브랜드 개발의 기반이 됐다. 1996년 출시된 아이오페는 피부 과학과 바이오 기술을 앞세운 기능성 브랜드로, 아모레퍼시픽이 축적해온 원료 연구 성과를 적극 반영했다. 안산 공장에서 축적된 미생물 발효 기술과 바이오 연구 역량은 이후 화장품 원료와 바이오 소재 연구로도 확장됐다.


아모레퍼시픽의 히알루론산 연구는 이후 의료·헬스케어 영역으로도 이어졌다. 2014년에는 고밀도 히알루론산 정제 및 가교 기술을 기반으로 전문 필러 브랜드 클레비엘을 선보였고, 관련 기술은 보건복지부 신기술(NET) 인증을 획득했다. 독자적인 '4L 가교 공정 기술'을 적용해 지속력과 탄성을 높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안면 볼륨 개선용 제품군도 출시했다. 화장품 기업의 원료 기술이 의료·바이오 영역으로 확장된 사례로 평가된다.


히알루론산을 활용한 시도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바이탈뷰티 를 통해 건강기능식품용 히알루론산까지 개발하며 '먹고 바르는' 이너뷰티 개념도 확장했다. 피부 겉과 속을 동시에 관리하는 홀리스틱 뷰티 전략 역시 이러한 연구의 연장선이었다.


아모레퍼시픽몰


2022년에는 40년에 가까운 연구 성과를 집약한 '블루 히알루론산'도 선보였다. 아모레퍼시픽은 이중 발효와 10단계 농축·정제 공정을 통해 기존 대비 약 1/2000 크기의 초저분자 히알루론산 구현에 성공했다. 피부 흡수 효율과 피부 장벽 개선 효과를 높인 이 성분은 라네즈 워터뱅크 라인의 핵심 원료로 적용됐다.


1984년, 해외 기술 의존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작된 한 기업의 도전은 단순한 원료 개발 이상의 의미를 남겼다. 아모레퍼시픽의 히알루론산 국산화는 한국 화장품 산업의 원료 독립 역사이자, K-뷰티가 '추격자'에서 '기술 창조자'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