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지난 15일 13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조선 왕실의 비극적 역사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단종 이홍위와 엄흥도의 애절한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며, 영월과 순흥 등 촬영지까지 성지순례 코스로 떠오르고 있다.
영화의 인기와 함께 570여 년 전 조선 왕실의 권력 투쟁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일부 관객들은 "수양대군은 알았는데 금성대군은 잘 몰랐다", "안평대군은 수양대군 편이었나?", "세종 아들이 총 몇 명이었지?" 등 관련 역사적 사실에 궁금증을 보이고 있다.
세종대왕은 정비인 소헌왕후 심씨 사이에서만 무려 8남 2녀를 두었고, 후궁들까지 합치면 총 18남 4녀를 두었다.
8명의 대군들은 어떻게 피의 권력 다툼에 휘말리게 됐을 지 '조선왕조실록' 등을 통해 조명해 봤다.
세종대왕의 8명 아들들은 각각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인재들이었다. 첫째 문종이 일찍 세상을 떠나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면서 이들의 운명은 극명하게 갈라졌다.
첫째 문종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병약해 재위 2년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둘째 수양대군은 문무를 겸비했으며 특히 무예와 사냥에 뛰어났다.
12세의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등 고명대신들을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수양대군은 정난 이후 단종을 압박해 왕위를 선양받고 조선 제7대 국왕 세조가 됐다.
이후 자신을 반대하는 사육신을 처형하고, 조카 단종마저 노산군으로 강등시켜 영월로 유배 보낸 뒤 죽음에 이르게 했다.
셋째 안평대군은 시문, 그림, 글씨에 뛰어나 '삼절'로 불렸던 당대 최고의 예술가였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단종 즉위 후 수양대군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경쟁자가 됐으며, 김종서, 황보인 등과 뜻을 같이하며 수양대군을 견제했다.
계유정난이 발생한 밤 수양대군 세력에 의해 가장 먼저 체포됐다.
'단종실록'에 따르면 그는 역모를 꾸몄다는 죄명으로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교동도로 옮겨진 지 불과 8일 만에 사약을 받고 35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뛰어난 예술 작품들도 반역자의 것으로 몰려 대부분 소실됐다.
여섯째 금성대군은 성품이 강직하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수양대군의 찬탈을 가장 맹렬하게 비판했던 형제였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모반을 꾸몄다는 혐의로 삭탈관직 당해 유배길에 올랐고, 이듬해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됐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금성대군은 유배지 순흥에서 부사 이보흠과 함께 영남 지역의 선비들을 규합해 단종을 다시 왕위에 올리려 밀의를 꾸몄다. 그러나 관노의 고발로 발각되어 1457년 사사당했다.
이 사건은 영월에 있던 단종에게도 사약이 내려지는 도화선이 됐다.
한편, 넷째 임영대군은 무예에 능했지만 처세술도 뛰어나 수양대군 편에 서서 천수를 누렸다. 다섯째 광평대군과 일곱째 평원대군은 형제들의 권력 투쟁이 벌어지기 전 이른 나이에 요절했다.
여덟째 영응대군은 세종이 가장 아꼈던 막내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이후에도 세조와 각별한 우애를 유지하며 정치와 거리를 둔 채 조용히 천수를 누렸다.
세종대왕은 자식들을 끔찍이 아꼈던 아버지였다. 하지만 가장 찬란했던 세종 시대를 물려받은 아들들은 권력이라는 비정한 수레바퀴 아래서 서로를 죽이고 죽는 조선 역사상 가장 잔혹한 골육상쟁의 주인공이 됐다는 사실이 씁쓸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