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2월 15일(일)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 초콜릿 대신 안중근 기억하자며 2030 사이 확산중인 '2월14일' 의미

116년 전 오늘인 1910년 2월 14일, 마나베 주조 재판장은 조선총독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독립운동가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첫 공판 개시 후 불과 일주일 만에 나온 신속한 판결이었습니다. 


안중근은 판결 직후 재판부를 향해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살해한 미우라는 무죄인데, 이토를 쏴 죽인 나는 사형이라니, 일본법이 왜 이렇게 엉망이냐"며 강하게 항의했습니다. 


안중근의사기념관


재판부는 이에 대해 어떠한 답변도 하지 못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1909년 10월 26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안중근은 러시아제국 재무대신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의 회담차 하얼빈역을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과감하게 총격을 가했습니다. 


안중근이 발사한 권총 3발은 모두 이토의 몸을 관통했고, 이토는 30분 만에 사망했습니다.


안중근은 이토의 얼굴을 정확히 알지 못했던 탓에 동행자들인 가와카미 도시히코 하얼빈 총영사, 모리 야스지로 궁내대신 비서관, 다나카 세이지로 남만주철도 이사에게도 총격을 가했지만 사살에는 실패했습니다.


현장에서 러시아 헌병에 의해 체포된 안중근은 "코리아 우라"를 세 차례 외치며 의연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코리아 우라'는 러시아어로 '대한민국 만세'를 의미합니다.


뮤지컬 영화 ‘영웅’에 나오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 의거 장면. 환영 인파에서 빠져나온 안중근(정성화)이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권총 방아쇠를 당기고 있다 / CJ ENM


하얼빈이 러시아 조계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안중근의 재판권 문제는 복잡하게 전개됐습니다. 


일본과의 마찰을 우려한 러시아가 재판권을 포기하면서 안중근은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을 거쳐 약 900㎞ 떨어진 뤼순감옥으로 이송됐습니다.


일본 조계지인 뤼순에서 일본은 안중근을 구금한 채 기소부터 재판까지 신속하게 진행했습니다. 변호인으로는 일본인 관선 변호사 1명만이 허용됐습니다.


안중근은 거사 4개월 후인 1910년 2월 7일 공모자인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첫 공판에 출석했습니다.


공개재판으로 진행된 첫 공판에서 안중근은 당당한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일제와 이토의 죄상을 조목조목 고발했습니다.


뮤지컬 영화 '영웅'


안중근은 "한국 의병의 참모 중장으로서 독립전쟁에 참여해 이토를 처단했는데, 참모 중장인 제가 이 법원 공판장에서 심문받는 것은 잘못됐습니다"라고 당당히 말했습니다.


이토를 처단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안중근은 △명성황후 시해 죄 △1905년 11월 한국을 일본 보호국으로 만든 죄 △1907년 정미7조약 강제 체결 죄 △고종황제 폐위 죄 △동양 평화 파괴 죄 등 15가지 죄상을 명확히 제시했습니다.


재판부는 안중근의 발언에 당황하며 급히 방청객 전원을 퇴실시켰습니다. 이후 모든 재판은 비공개로 전환됐습니다.


고무라 주타로 외무대신은 뤼순에 파견된 구라치 데쓰키치 외무성 정무국장을 통해 재판부에 "안중근의 범행은 극히 중대하므로 극형에 처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의견을 전달했습니다.


이러한 압력을 받은 재판부는 혼란스러워했지만, 결국 첫 재판 개시 1주일 만에 사형 판결을 내렸습니다.


안중근은 처음에는 항소를 고려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조마리아로부터 받은 편지 한 통이 그의 결심을 바꿨습니다. 편지에는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죽음을 받아들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뮤지컬 영화 '영웅'


"다른 마음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아마도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안중근은 재판부에 항소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동양평화론' 집필 시간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이 저술을 통해 독립운동 투신 과정과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이유를 명확히 밝히고 싶어했습니다. 


또한 옥중 투쟁을 논리적으로 정리하고자 했습니다. 안중근은 자신을 대한의군 참모중장 신분으로 총살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일제는 그의 간절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선고 약 한 달 후인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일제는 안중근을 대한의군 참모중장이 아닌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며 교수형을 집행했습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서문, 전감, 현상, 복선, 문답으로 구성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형 집행으로 인해 '전감' 부분에서 집필이 중단됐습니다. 미완성 작품이지만 '동양평화론'에는 안중근 평화사상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안중근은 동양평화 실현을 위해서는 한반도와 만주를 침탈하려는 일본의 침략주의를 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뮤지컬 영화 '영웅'


일본이 침략 야욕을 포기하고 한국, 중국과 협력해 서양 침략세력을 방어할 때 동양평화는 물론 세계평화도 달성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동양평화론'은 안중근 독립운동 철학의 정수이자 세계 평화사상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저작입니다.


안중근은 국권 회복 시 자신의 시신을 고국에 안장해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이는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그의 유해 매장 위치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1946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그의 묘역이 조성됐지만, 80년째 시신이 없는 가묘 상태로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