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차기 구축함(KDDX) 선도함 수주전이 단순한 조선 대형 프로젝트를 넘어, 한국 방위산업 주도권을 둘러싼 플랫폼 경쟁으로 성격이 바뀌고 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군사기밀 유출 업체에 대한 수의계약 논의를 공개석상에서 문제 삼으면서, 방산 3사 통합 플랫폼을 앞세운 한화그룹과 기존 강자인 HD현대중공업 사이의 명분 싸움에 불이 붙은 모양새입니다.
지난 5일 이 대통령은 충남 천안에서 열린 타운홀 미팅에서 방산 비리 근절을 요구하는 참석자 발언에 답하면서, 군사기밀을 빼돌려 처벌받은 곳에 수의계약을 주자는 이야기가 나온다며 방위사업청장에게 이를 잘 점검하라고 주문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특정 업체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업계 관계자들은 과거 HD현대중공업 직원 9명이 당시 대우조선해양이 보유하던 KDDX 관련 개념설계 자료를 촬영해 유출했다가 유죄를 선고받은 사건을 겨냥한 것이라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HD현대중공업은 방위사업청으로부터 무기체계 사업 제안 평가 시 보안감점을 받는 제재를 받았습니다. 이 제제를 최대 2026년 12월까지 연장하는 방안이 한때 발표됐다가, 현재는 세부 적용 방식이 재검토되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KDDX 선도함 사업과 관련해 정부와 군은 HD현대중공업과 수의계약을 맺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해왔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KDDX 사업은 2030년까지 약 7조 8천억 원을 들여 6천톤급 차세대 이지스 구축함 6척을 확보하는 프로젝트인데, 개념설계는 옛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기본설계는 HD현대중공업이 맡았습니다. 기본설계는 2023년 말 완료됐지만, 상세설계 및 초도함 건조 사업자 선정은 각종 이견과 절차 논란으로 거의 2년 가까이 지연돼 왔습니다.
해군과 방위사업청은 기본설계를 이미 수행한 HD현대중공업과 수의계약을 맺는 방안을 일정·전력 공백 측면에서 선호해 온 것으로 전해집니다. 일정과 리스크 관리 면에서 좋고, 전력 공백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 대통령 발언으로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원래 보안감점은 경쟁입찰에서 점수로 반영되는 장치이지, 수의계약의 법적 결격 사유는 아니라는 것이 그간의 해석이었으나 국가기밀을 유출해 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업체에 대형 방산 프로젝트를 수의계약으로 맡기는 게 국민 눈높이에 맞느냐는 질문이 대통령 입에서 공개적으로 나오면서 변수가 생겼습니다.
방위사업청이 기존 계획대로 HD현대중공업과 수의계약을 강행할 경우, 향후 국회와 감사, 여론의 집중 검증을 피하기 어렵게 된 셈입니다.
이 지점에서 한화그룹의 방산 3사 통합 전략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한화그룹은 김동관 부회장의 리더십 아래 한화오션(함정·선체), 한화시스템(전투체계·레이더), 한화에어로스페이스(엔진·포·미사일·유도무기)를 묶어 하나의 방산 플랫폼으로 내세우는 작업을 몇 년 전부터 본격화해 왔습니다.
국내 방산 전시회에서는 세 회사를 하나의 통합관으로 꾸려 해양·공중·지상·우주 전력을 하나의 체계처럼 보여주고 있고, 해외에서는 한국형 방산 생태계의 대표주자라는 이미지 구축을 시도 중입니다.
KDDX는 이 통합 플랫폼 전략을 현실에서 증명할 수 있는 최적의 무대에 가깝습니다. 한화오션이 선체와 추진 계통, 한화시스템이 전투체계와 레이더,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함포와 미사일, 유도무기와 추진체계를 담당해 하나의 구축함을 통째로 패키지로 제공한다는 그림이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화 입장에서는 KDDX를 단순한 함정 수주가 아니라, 한화식 방산 플랫폼이 해군 주력 전력까지 책임질 수 있는지 검증받는 시험대로 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화오션도 이런 배경 때문에 줄곧 경쟁입찰을 요구해왔습니다. 방위사업청은 최근 내부 회의에서 KDDX 상세설계를 두 회사가 공동으로 수행하는 방안과 함께, 이후 선도함 1·2번함 발주 방식에 대해 두 척을 동시에 발주해 각사에 한 척씩 배분하는 안, 2번함을 앞당겨 조기 발주하는 안 등 여러 시나리오를 놓고 검토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업계에서는 이런 구상이 한화가 주장해 온 공정 경쟁 명분과 해군의 전력화 일정 우려를 동시에 감안한 절충안의 성격으로 보고 있으며, 한화오션 역시 공동 설계 자체에 대해서는 대체로 수용 가능한 기류를 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반면 HD현대중공업의 입장은 복잡합니다. 기술과 실적 면에서는 여전히 우리 해군의 대표 수상함 조선소라는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종대왕급 이지스 구축함과 차기 한국형 이지스함 건조 경험을 가진 국내 유일의 업체이고, 해군이 실제 운용해 본 대형 함정 포트폴리오 대부분을 쌓아온 곳이기도 합니다. 세계 시장을 통틀어서도 대형 상선과 군함을 동시에 건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조선소입니다. 선체 설계와 통합 관리 역량은 의심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번 KDDX 수주전에서는 그 강점이 온전히 발휘되기 전에 기밀 유출 사건의 그늘이 가려지는 모양새입니다. 직원 9명이 경쟁사의 개념설계 자료를 무단 촬영·유출해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으로 유죄를 확정받은 사실, 이에 따라 방위사업청이 보안감점 적용 기간을 1년 넘게 연장한 결정은 앞으로도 반복해서 소환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기선 HD현대 회장의 취임과 HD현대중공업·HD현대미포 합병으로 탄생한 통합 법인 HD현대중공업 출범이라는 경사 속에서도, 이번 논란은 그룹 입장에선 여전히 뼈아픈 숙제로 남아 있는 셈입니다.
대통령이 직접 군사기밀을 빼돌린 업체에 대한 수의계약 논의를 문제 삼은 이상, HD현대중공업은 수상함 강자로서의 기술력과 실적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기밀 관리와 준법 감시 체계를 어떻게 손질했는지까지 설득력 있게 보여줘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됐습니다.
결국 KDDX는 한화그룹과 HD현대중공업 모두에게 하나의 시험대가 되고 있습니다.
한화에는 방산 3사 통합 플랫폼이 구호를 넘어 실제 대형 함정 사업을 책임질 수 있는지 증명해야 하는 사업이고, HD현대중공업에는 기존 수상함 강자 자리를 지키면서 기밀 유출과 보안 리스크를 관리할 수 있는 거버넌스 수준을 보여줘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방위사업청이 최종적으로 수의계약, 경쟁입찰, 공동 설계·공동 건조 가운데 어떤 방식을 택하든, 이번 KDDX 선도함 수주전이 한국 방위산업 판도를 가르는 플랫폼 경쟁의 첫 라운드가 되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