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6일(월)

이완용급 '친일파' 아들이 한국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던 '반전' 이유

이종찬 전 국방부 장관 / Wikipedia


친일파가 참군인?


[인사이트] 함철민 기자 = 지난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됐음에도 많은 이들에게 '참군인'으로 칭송받는 인물이 있다. 


제8대 국방부 장관을 지낸 이종찬 전 국방부 장관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오늘날 외교부 장관이라 할 수 있는 대한제국 외부대신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이권을 일본에 넘겨주고 귀족의 신분을 얻은 '친일파'이기도 하다. 


친일파 이하영 / 朝鮮貴族列傳


아버지 또한 할아버지의 작위를 물려 받았으며 사망 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종3위에 추서됐던 대표적인 친일파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으로 유복한 집에서 태어난 이종찬은 193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다. 이후 일본군 장교로서 그의 활약은 눈부셨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공병 소대장으로 참전했으며, 태평양 전쟁 때는 최전선에서 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 장교로서 활약은 대단했다. 일본군 최고의 영예라 할 수 있는 금치훈장을 받았는데, 한국인 출신 일본인 장교 중 금치훈장을 받은 건 단 2명뿐이다. 


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일본패망하루전'


아버지의 일본 귀족 신분 거절..."나는 민족의 죄인"


귀족 신분으로 전쟁에 참여했다는 소식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후광을 입고 탄탄대로를 걷는 그였으나, 한편으로는 민족을 향한 미안한 마음이 있었던 듯하다. 그는 일본군을 위해 싸우기 보다 개인의 신념을 더욱 우선시했다. 


한 번은 태평양의 한 섬에서 원주민 처녀를 잡아오라는 상관의 명령을 거절했다가 최전방 요새로 전출당하기도 했다. 


육군대학 총장 시절 / 국가기록원


1945년 4월 아버지가 사망하자 귀족 신분을 세습하라는 일본 정부의 통지를 거부한다. 스스로 귀족의 지위를 포기한 것이다. 


결혼과 관련한 그의 이야기도 눈길을 끈다. 평소 효자로 알려졌던 이종찬은 처음으로 어머니의 말을 거역하는데 바로 예비신부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신부 집안이 별 볼일 없다는 점을 문제 삼자 "친일파였던 우리 집안이 과연 그렇게 잘났느냐"며 결혼을 강행했다고 한다. 


1950년 10월 1일 국군이 38선을 돌파하는 모습 / 국가기록원


백골부대 이끌며 38선 돌파...국방부장관 역임까지


해방 이후 그는 '민족의 죄인이니 자숙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며 입대를 거부하다가 1949년 공병대령으로 임관했다.


그리고 6·25전쟁 때 세운 공은 대단했다. 전쟁 당시 그는 백골부대로 잘 알려진 3사단을 맡아 최초로 38선을 돌파했다. 그가 38선을 돌파한 날은 '국군의 날'로 지정됐다. 


영천에서는 마을에 직접 포격하고 불도 질러 북한군을 무찌르라는 상관의 명령에 주민들이 살고 있는 곳에 어떻게 쏠 수 있냐며 항명했다고 한다. 


1951년 당시 이기붕 국방부 장관, 정일권 장군 등과 함께 자리한 이종찬 장군 / Wikipedia


육군참모총장에 올랐던 때는 1951년, 만 35세 때 일이다. 


젊고 유능한 장군이었던 그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내린 계엄령을 '군은 군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고 정치적 중립을 지키라'며 거절했다.


이후 그는 1960년 육군 준장으로 예편한 뒤 국방부 장관을 시작으로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국방부 장관 당시 / 국가기록원


친일파인 사실을 부정할 수 없어...한국 근현대사를 증언하는 입체적인 인물


이종찬 장군은 일본군 장교로 다수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점 등 흠결이 없는 인물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자신의 집안이 저지른 친일 행위를 부끄러워하고, 작위 세습을 거절했다. 해방 이후에는 군의 정치 참여를 비판하며 군인으로서의 중립성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했다. 


친일 행위를 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신사적이고 의로운 행보를 보인 것 또한 사실이다. 이에 이 전 장군은 고난의 한국 근현대사를 증언하는 입체적인 인물이란 평가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