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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목숨 바쳐 조선 지킨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가 세상을 떠난 날입니다"

한국을 조국보다 더 사랑했던 미국인 헐버트 박사는 1949년 8월 5일 한국에서 눈을 감았다.

인사이트(좌) 호머 헐버트 / 국가보훈처, (우) 호머 헐버트 묘비 / 뉴스1


[인사이트] 김천 기자 = "나는 미국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69년 전 오늘인 1949년 8월 5일, 조선의 온전한 국권 회복을 위해 힘썼던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 '호머 헐버트'가 숨을 거뒀다. 그는 유언대로 한국 땅에 묻혔다.


호머 헐버트는 지난 1886년 처음으로 조선 땅에 발을 디뎠다. 그는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서 교사직으로 조선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헐버트는 열정적였다. 자신의 사비를 털어 한국어를 배웠고 3년 만에 한글로 책을 저술할 정도였다.


헐버트가 조선의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된 계기는 일제의 침탈 행위를 목격하고 나서부터다. 그는 조선의 국내 정치, 외교 문제를 공부하고 더 나아가 조선의 자주권 회복 운동까지 뛰어들었다.


인사이트뉴스1


헐버트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고종을 호위하고 최측근 보필 역할과 자문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조선에 거주하면서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한다.


1905년 일본에 의해 우리나라의 외교권이 빼앗긴 을사늑약 때는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무효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려 했으며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주장했다.


그는 고종으로부터 친서를 받아 미국 국무장관과 대통령 면담을 시도하기도 했다. 면담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조선에 다시 방문해 일제의 야욕과 탄압행위를 폭로했다.


헐버트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는 데에도 크게 일조 했다.


인사이트뉴스1


이러한 운동을 계속 시도하는 헐버트의 행보는 일본에게 눈엣 가시와 같았다. 일본은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헐버트를 한국에서 추방한다. 


1907년 미국으로 돌아간 헐버트는 미국 전역과 전 세계에 일본 제국의 침략을 규탄했다. 또 독립운동가 여운홍과 함께 1918년 파리 강화회의를 위한 '독립청원서'를 작성했다. 일본에 의해 강제점거 됐던 1919년에는 3·1운동을 지지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한국에 무한한 애정을 쏟았던 헐버트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듬해인 1949년 한국을 방문했다. 헐버트는 42년 만에 찾은 한국 땅에서 1주일 후 86세의 일기로 눈을 감았다.


헐버트는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했던 유언에 따라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양화진에 묻혔다. 그에게는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이 추서됐다.


인사이트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