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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별로 살펴보는 영화 '택시운전사'의 역사적 사실

군부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영화 '택시운전사'의 배경인 광주를 만들었다.

인사이트(좌) 영화 '택시운전사', (우) 5·18기념재단


[인사이트] 이하영 기자 = 5·18 민주화 운동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망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삼선개헌, 유신헌법, 긴급조치' 등으로 군사독재를 이어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부하였던 김재규의 총에 죽임당했다.


국민은 진정한 민주주의 세상을 바랐지만 국정 공백을 틈타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가 '12·12 군사 정변'을 일으켰다.


군부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국적으로 수많은 대학생과 시민들이 자율화와 민주화를 외치던 '80년의 봄'이 시작되었다.


인사이트영화 '택시운전사'


5월 13일 민주화를 꿈꾸는 많은 사람이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 전두환·신현확 등 유신잔당의 퇴진'을 외치며 거리 시위를 이어갔다.


이틀 뒤 서울역 앞 집회에서 정점을 이룬 그들에게 신현확 국무총리가 "시위를 그만두라"는 특별 담화를 발표하자 시위대는 '서울역 회군'을 단행한다.


야당 대표는 19일까지 시국수습 대책에 답변하라고 요구하지만 이 요구는 17일 24시를 기준으로 전국적으로 '계엄령 확대'를 선언하게 만든다.


이때 광주에서도 민주화 운동이 지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왜곡 보도로 다른 지역의 국민들은 광주에서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이 일어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5월 13일- 민주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의 거리시위가 광주에서도 시작됐다


인사이트5·18기념재단


신군부는 재야 정치인과 민주화운동 관련자를 시위 중심세력으로 규정하고 연금 및 구금했다.


그들은 국회를 비롯한 정부기관과 대학, 각종 언론사와 방송사 등에 계엄군을 주둔시켜 언론을 장악하고 왜곡보도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때 광주에서는 전북대학교에 주둔한 계엄군에 의해 이세종 학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5월 18일-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시작된 계엄군의 진압으로 학생과 시민들이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인사이트5·18기념재단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을 막아 세운 계엄군들은 학생들이 항의하자 그들을 구타하고 연행하기 시작했다.


계엄군은 말리는 시민들까지 폭행했으며, 소식을 전해 들은 학생들과 시민들은 그들의 만행을 폭로하기 위해 전남 도청으로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조금이라도 사람이 모이면 해산하라며 폭행하는 계엄군에 의해 소극적이던 사람들은 점차 거센 항거와 집단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5월 19일- 장갑차와 헬기를 동원한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발포를 시작했다


인사이트5·18기념재단


새벽 3시경 장갑차와 헬기까지 동원해 무장한 계엄군이 광주역에 도착한다.


그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시민들을 향해 발포를 시작한다.


저항은 더욱 거세졌으나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행사로 사망자가 계속해서 늘어난다.


5월 20일- 계엄 당국에 의해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인사이트영화 '택시운전사'


오전 8시경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계엄 당국이 휴교령을 내린다.


오후가 되자 도심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계엄군은 진압봉을 휘둘러 저지하려 한다.


오후 6시 40분경 중심가인 금남로에 화물차, 버스, 택시 등으로 구성된 200여 대의 차량 시위대가 나타나자 계엄군과 경찰은 최루탄과 가스를 발사하고 탑승자를 공격했다.


시민들은 노동청과 세무서로 몰려가 과도한 진압을 규탄했으나 광주의 상황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고, 이 와중에 광주 MBC는 화마에 휩싸였다.


5월 21일- 계엄군의 폭압에 시민들은 무기를 확보하고 '시민군'으로 등장해 계엄군을 철수시킨다


인사이트5·18기념재단


오전 2시 전화가 차단되고, 오전 8시경 교전이 발생하여 군인 다수가 사망하기도 한다.


오후 1시경 시민의 물결은 전남도청을 향했고 이를 저지하려는 계엄군이 총을 난사하며 많은 시민이 사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다.


이에 시민은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 등의 차량을 확보해 광주·전남 일대의 경찰서와 예비군 탄약고에서 무기를 확보해 '시민군'으로서의 면모를 갖춘다.


인사이트5·18기념재단


시민군과 계엄군의 대립은 한동안 시가전 양상을 띠며 지속하고 결국 오후 5시 30분경 계엄군이 전남도청에서 철수하게 된다.


이후 계엄군이 광주와 전남을 오가는 시민의 통행을 막아 광주는 26일까지 7일 동안 고립된 채 '시민 자치제'를 실시한다.


이때 전남도청 분수대에서는 매일 '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되어 자유롭게 발언하며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지혜를 모았다.


사람들은 주먹밥과 빵 등 음식을 대가 없이 나눴으며 부상자를 돕기 위해 자진해서 헌혈하는 등 진정한 공동체를 실천했다.


5월 26일- 계엄군이 다시 탱크를 앞세우고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인사이트5·18기념재단


다른 지역에 광주를 '치안 부재 상태'라 말하던 계엄군은 다시 무장한 탱크를 앞세우고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시민대표들은 맨몸으로 탱크를 저지했고 힘겹게 하루를 넘겼지만 그 이상은 여의치 않았다.


5월 27일-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많은 시민이 죽임당했다


인사이트5·18기념재단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27일 새벽 광주 도심을 울렸던 이 외침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새벽 4시경 다시 전남도청으로 들어온 계엄군은 1시간 남짓의 짧은 교전 동안 많은 시민이 죽음으로 몰아넣으며 광주 민주화 항쟁을 종결시켰다.


인사이트영화 '택시운전사'


6개월 뒤인 신군부의 핵심인사 전두환은 1981년 1월 창당한 민주정의당 총재가 된다.


그로부터 1개월 후인 2월 그는 개정된 헌법에 따라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재임 기간에 군부독재라는 비판을 받으며 1987년 6월 대통령 직선 제 요구를 결국 수용하고 물러난다.


1995년 5·18민주화운동은 '5·18 특별법' 제정으로 당시 신군부에 의해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매도당했던 광주의 진실이 살아남은 이들의 끈질긴 투쟁으로 빛을 발하게 된다.


전직 대통령이자 계엄군의 핵심인사였던 전두환, 노태우 등을 비롯한 92명을 법의 심판대 앞에 세워 내란·내란목적살인죄 등으로 처벌받게 했다.


그러나 그는 올해 4월 발간한 회고록에서 당시 광주 상황에 대해 "의도적이고 무차별한 양민 학살은 없었다"라고 언급하며 "자신은 희생자"라고 주장하는 등 거짓 발언으로 재차 논란의 중심에 섰다.


조조 영화로 '택시운전사' 본 누리꾼들이 남긴 관람평영화 '택시운전사'가 개봉하자마자 관객들의 호평을 받으며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


이하영 기자 hayoung@insight.co.kr